[윤창규 칼럼] 전통유학의 마지막 유종(儒宗) - 중재 김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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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규 동아시아센터 회장
입력 2018-07-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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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규 동아시아센터 회장


20세기는 우리 역사에서 유교이념의 전통사회가 무너지고 서구문물의 근대적 제도와 가치관이 정립되어 가는 과정이요, 역사적으로 중대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간 많은 이들 중 우리는 중재(重齋) 김황(金榥·1896-1978)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선생은 갑오경장으로 유교이념의 전통사회를 포기한 시대인 1896년에 태어나 20세기 전반의 일제강점기와 20세기 후반의 제3공화국 유신정권 시기까지를 살았던 퇴계학파의 대표적 계승자이다. 또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과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의 학맥을 잇는 퇴계학통을 20세기 후반까지 지켜 왔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당시는 조선왕조가 붕괴하고 치욕적인 식민지 통치를 당하는 역사적 파국을 겪고 사실상 유교적 전통마저 급격히 쇠퇴하여 사회의 주도적 영향력을 상실한 시기였다. 해방 이후 선생은 좌우의 극심한 대립을 지나 부패한 정부와 독재 권력의 부조리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 시대정신에 밀려난 마지막 세대의 유학자 선비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선생은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 전통사회와 현대사회를 연결시킨 마지막 유종(儒宗:선비들이 우러러보는 큰 학자)의 구실을 하였다.

전통유학이 서구적 학문체제가 정립한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고뇌하였던 유학자로서 선생은 24세 때와 31세 때 유림독립운동으로서 제1차 유림단(儒林團) 독립사건인 파리장서사건으로 두 차례의 옥고를 겪었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이 상해로 가져가 임시정부의 김규식에 전하여 프랑스 파리에 가져간 파리장서(巴里長書)의 초고는, 스승 면우 선생의 명으로 중재 선생이 지었다 한다.

또한 같은 의성김씨 문중인 제2차 유림단 독립운동의 심산 김창숙과 모은 의거자금이 나석주(羅錫疇·1892-1926) 의사의 동양척식회사 폭탄 투척사건에 사용되었음이 알려져 구속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말의 외세를 배척하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의식에 따르는 의병운동과는 달리, 파리 만국평화회의나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되는 것으로서 전통을 수호하고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현실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보이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이에 1995년 정부는 선생에게 독립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학문적 과제는 퇴계·동강·한주·면우의 학통을 지키면서 20세기 한국사회의 사상사적 전환과정에서 도학정통(道學正統)을 지키고 ‘심즉리(心卽理)'설을 기반으로 하는 도학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성리학설(性理學說)에 있어 중재는 한주의 ‘심즉리’설을 따르면서도 기(氣)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주재자의 관점에서 보면 ‘심즉리’이지만 그 속에 기(氣)가 보조자로서 그대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중재의 학문하는 방법은 ‘경(敬)'을 위주로 그 근본을 세우고, 그 이치를 궁구(窮究)하여 그 앎을 확실히 했다. 이치를 궁구하는 일은 독서를 근본으로 하였는데,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가만히 가라앉혀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라 하였다.

중재는 평생 보발(保髮:머리를 기른 채로 보존함)하며 일평생 상투를 하여 전통유림의 모습을 고수하였고, 자녀들도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교육기관에는 보내지 않았다. 일제의 압력은 물론이고 일체의 비리와 무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도학(道學)의 정통을 지키면서 만년에 이르기까지 이를 널리 성심껏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데 힘썼다.

선생은 도학의 가치규범 대신 물리적·실리적 가치가 우위를 차지하는 시대에 살면서, 20세기 우리 사회가 겪은 사상사적 급류 속에 마음이 공리(功利)에 미혹되어 심(心)의 본체가 지닌 근원성을 확인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의리(義理)의 상실을 경고했다.

지금부터 40년 전 1978년 여름, 경남 산청의 내당서사(內塘書舍)에서 선생을 찾아뵈었다. 당시 약관 20세의 청년을 대하는 선생은 83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상투에 의관정제하고 맞절로 대하여 주었다. 시대가 변하였음에도 구학문을 배우고자 찾아온 젊은이에게 선생은 기특한지 지극과 정성으로 소학(小學)을 가르쳐 주었다.

옛날식 서당교육이 왜 학파와 학통을 형성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는 선생과 제자가 숙식을 같이하며 부모 이상으로 사랑과 정성으로 학문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우리네 교육방식인 서당교육은 학문과 스승의 인격이 생활 속에 묻어 있어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유교사상이 수천년간 내려온 생명력이기도 하였다.

스승의 이론과 사상을 지키고자 목숨까지 바쳐가며 살아온 조선의 선비들이 왜 그리하였던가를 알 수 있었다.

그해 겨울, 선생이 타계하여 당시로서는 드물게 마지막 유월장(逾月葬)을 지냈다.

중재는 유교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여 후학들에게 전수함으로써 학교 교육에서 전수되지 못하고 단절된 우리나라의 전통 학문을 계승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 후, 아들 정관(靜觀) 김창호(金昌鎬)는 청년대학생들의 요청으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한때 내당서사는 우리네 전통교육에 목마른 젊은 대학생들로 선대에 이어 전국 유림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중재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제자들은 도양서원(道陽書院)을 건립하였다.

동아시아센터 회장 윤 창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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