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익 칼럼] 문재인 정부와 콜럼버스의 달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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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익 IT과학부 부장
입력 2018-07-05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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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규제개혁 성과는 관련법 개정 리스트와 동의어

  • - 출제자의 의도도 모른 채 창의적인 답이 가능할까



 



'To break the rules, you must first master them.' 럭셔리 시계 대명사 오데마피게의 신문 광고 카피다. '규칙을 깨려면, 먼저 그것에 통달해야한다'는 의미다. 전설의 시계디자이너 제럴드 젠타가 설계한 팔각 베젤과 여덟개의 스크루는 오데마피게의 간판 모델 로열오크를 럭셔리 시계의 정상에 올려놓은 일등공신이다.

젠타는 원형이나 사각이 지배했던 시계 디자인의 틀을 완전히 깼고, 그 뒤에 수많은 스포츠워치 디자인의 표본이 됐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는 최근작 '추사 김정희'에서 추사체의 개성을 '입고출신(入古出新)'을 대표할 만하다고 평했다. 옛것을 마스터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는 뜻이다. 추사는 어린 시절부터 고금의 서체에 통달했다. 유 교수는 추사체를, 틀 안에서 놀지만 틀의 구애를 전혀 받지 않는 경지라고도 했다.

창의력이란 백지 위에 번쩍이는 섬광 같은 게 아니다. 적어도 1만 시간의 학습으로 축적된 수많은 데이터를 종합하고 그 본질을 꿰뚫은 후에 비로소 가능한 재능이다. 피카소의 추상화가 초기 수천, 수만장에 달하는 구상화의 바탕 위에서 꽃을 피운 걸작들이란 점이 이를 방증한다. 피카소의 초기 구상화는 다른 어떤 화가들보다 실사에 더 가까웠다.

창의력에 관한 인문학적 관점은 과학자들과도 일치한다. 뇌과학자 정재승은 '열두 발자국'이란 책에서 "창의력이란 뇌의 특정 부위들이 활발한 상호작용을 통해 연관성이 없어보이는 것들에서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능력"이라고 설명했다. 장기기억의 영역에 저장된 수많은 기존 정보들을 전두엽과 측두엽, 후두엽, 해마 등 각 영역이 교환하고 새롭게 조합하는 능력이 창의력이란 뜻이다. 학습이 창의력의 필요조건인 셈이다.

4차 산업혁명을 기치로 내건 문재인 정부는 얼마나 창의적일까.

4차 산업혁명의 주무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달 26일 발표한 '마이데이터 시범사업 계획'은 이를 가늠할 단면이다.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의결하고 과기정통부가 후속 조치를 마련하는 식으로 계획된 이 사업의 내용에 대한 설명은 일단 차치한다.

중요한 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이 계획을 발표하면서 밝힌 사업추진의 배경이었다. 이 계획은 각 부처가 규제개혁의 성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전날 과기정통부가 선제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과기정통부 한 관계자는 당시 "관련법의 개정 없이도 바로 시행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개인정보의 상업적 이용 활성화를 위한 규제개혁이 행정안전부 등 관련 부처와의 엇갈린 이해관계, 참여연대의 반대로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짜낸 고육지책이었다는 의미다.

이는 규제의 본질은 고사하고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정부의 규제는 반드시 법적 근거가 있어야 하고, 실제 규제의 수만큼 관련법이 존재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시한 규제개혁을 방법론적으로 해석하면 관련법의 개정이나 폐지를 의미한다. 필요하면 법 개정도 해야 한다. 개인정보 관련 규제를 개혁하려면 개인정보보호법을 개정해야 한다. 각 부처가 대통령에게 제출할 규제개혁 성과 보고서는 따라서 규제와 관련된 법의 개정 리스트다.

법 개정 리스트를 제출하라고 한 주문에 법 개정을 하지 않고도 시행할 수 있는 사업계획서를 내밀겠다는 것을 가상한 노력의 결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정부 출범 1년이 지났고, 문재인 대통령이 규제개혁을 콕 집어 주문한 지 반년이 지난 시점이다. 과기정통부는 창의력을 발휘해 달걀을 세우라는 미션에 달걀이 둥글어 세울 수 없다는 답을 한 셈이다. 출제자의 의도도 모르는데 어찌 창의적인 답이 나올 수 있을까.

문재인 대통령이 주문한 건 4차 산업혁명의 주체이자 조력자인 정부가 부처 간 권력관계를 조정하고, 기득권층과 참여연대의 반발을 누르고라도 관련 법을 개정하란 의미다. 오른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자르는 게 어찌 쉽겠는가.

규제개혁 성과보고가 예정됐던 지난달 27일 당일 정부의 모습은 이보다 훨씬 어이가 없다. 성과보고 3시간 전 이낙연 총리의 건의로 대통령이 돌연 일정을 취소해 버린 것이다. 사실상 성과라고 보고할 만한 게 없었다. 죄다 반복적으로 보고됐던 계획들이었다. 주무부처 장관들은 줄줄이 총리에게 깨졌고, 대통령은 대로했다고 한다.

규제개혁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절박감이 드러난 해프닝이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 6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경제 정책의) 성과를 낼 시간적 여유가 짧게는 6개월 길게 잡아도 1년 밖에 안 남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기감, 초조감이 크다”고 했다. 그는 이어 규제혁신이 지지부진한 이유를 시민단체의 반대로 지목하며 “(문 대통령이) 지지자들의 비판을 받을 수 있는 결단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다행인 것은 이날 군기잡기가 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지난 4일 한 포럼에서 "개인정보의 산업·상업적 활용 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히겠다"며 "개인의 익명정보는 물론이고 가명정보도 원칙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법안을 마련 중"이라고 했다. 참여연대를 중심으로 집요한 반대가 있지만 법 개정을 늦출 수 없다고도 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도 이날 생명보험협회 주관의 한 세미나에서 "금융분야에서 혁신적인 사업자가 나타날 때 기존 규제 때문에 저해되는 일이 없도록 여러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했다. 인터넷 정보 활성화를 위한 은산분리 규제를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해석된다.

정부의 창의력 부재를 강력한 지도력이 대체할 수 있다면 천번만번이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낙연 총리의 군기잡기는 결과적으로 창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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