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창] ​평양거래소와 표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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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영 증권부 부장
입력 2018-07-0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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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라오스와 캄보디아에는 증권거래소가 없었다. 두 나라는 한국거래소에서 도와준 덕분에 증권거래소를 만들었다. 우리나라가 자본시장 운영체계를 수출한 드문 사례다. 열흘 전쯤 만난 정지원 거래소 이사장은 이를 힘줘 얘기했다. 북한이 증권거래소를 연다면 당장이라도 거래소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거다.

증권거래소가 없는 나라는 얼마나 많을까. 인터넷 위키백과에는 29개국으로 나온다. 제법 많아 보이지만 면면을 따지면 그렇지도 않다. 이런 나라는 대개 도시국가다. 인구가 2000만명 이상인 나라는 4곳밖에 안 됐다. 앙골라(3100만명)와 예멘(2900만명), 니제르(2200만명)와 함께 북한(2600만명)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증권거래소 없이 사는 큰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럼 북한은 증권거래소 개설에 얼마나 늦었을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경제개발 본보기로 삼겠다는 싱가포르는 45년 전인 1973년 거래소를 열었다. 중국은 상하이에 거래소를 세운 지 28년밖에 안 됐다. 물론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빨랐다. 메이지 천황 시절인 1878년 도쿄에 증권거래소를 세웠다. 일본에 비하면 중국이 한 세기, 우리나라(1956년)도 반세기 넘게 늦었다.

남북은 3년 만에 시계를 똑같이 맞췄다. 4·27 남북 정상회담에서 동일한 표준시를 쓰기로 했다. 온통 비핵화에 관심이 쏠려 있었는데도 눈이 갔다. 종교개혁을 이끌어 낸 마틴 루터는 "달력은 세상을 지배한다"고 말했다. 독일 고대사학자인 알렉산더 데만트는 '시간의 탄생'에서 이 얘기를 인용한다. 과거에는 다른 경도에 놓인 두 나라가 한 달력을 쓰려면 전쟁을 감수해야 했다. 적어도 서울·평양은 이런 무모한 모험을 감행하지 않아도 주식거래를 시차 없이 할 수 있다.

"북한에 모든 재산을 투자하겠다." 세계 3대 투자가로 불리는 짐 로저스가 이미 3년 전에 꺼낸 얘기다. 그는 얼마 전 언론 인터뷰에서 '평양거래소' 개설을 장담했다. "북한은 자본주의를 알고 있고, 잘사는 이웃 나라처럼 부유해지기를 바란다. 몇 년 전에는 모두가 나를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통일은 3~4년 후 이뤄진다." 통일이야 모르겠지만, 자본시장 전망에는 이제 묵직함이 있다.

평양거래소가 생겼다고 가정하자. 상장할 만한 회사는 존재할까. 몰랐는데 생각보다 많다고 한다.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면서 큰돈을 버는 기업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기업 가운데 조선부강그룹은 계열사를 24곳이나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우리가 자본가로 부르는 '돈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처럼 무르익기 시작한 시장경제는 평양거래소 개설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돌다리도 두들기면서 건너라고 했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북한에서는 금융이나 자본시장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서구식 자본시장을 열 때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는 걸림돌이다. 외국 자본은 반드시 북측과 합자해야 회사를 세울 수 있고, 지분율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하기도 어렵다. 더 본질적으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경제체제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중국은 북한에 자본시장을 만들 때 가만히 있을까. 그러지 않을 것이다. 중국 선전거래소는 얼마 전 우리 거래소와 손잡았다. 선전 주식시장에 속한 상장법인을 코스닥에 교차상장시키기 위해서다. 중국은 홍콩 주식시장뿐 아니라 영국 런던거래소와도 교차거래를 앞두고 있다. 위안화 국제화를 꿈꾸기 때문이다. 중국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이나 일대일로(실크로드 전략)에 공들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장 큰 걱정은 우리 증권가에 있다. 초대형 투자은행(IB)으로 불리는 증권사가 5곳이나 돼도 이름값을 못한다. 국내 인수·합병(M&A) 시장 규모는 2015년 96조원을 넘어섰다. 안타깝게도 당시 M&A 수임액에서 외국계 IB가 차지한 비중은 80%에 육박했다. 이런 상황은 북한에서 그대로 이어질 수 있다. 새 정부 들어 '금융소외론'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남북이 공유할 자본시장은 지금부터 얼마나 철저하게 대비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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