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窓] 다시 찾아온 '한반도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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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 국제뉴스국 국장
입력 2018-06-27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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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대통령 임기 중이던 1991년은 구(舊)질서가 무너진 격랑의 한 해였다. 직전 해에 일어난 독일의 통일을 기점으로 동구권이 연쇄적으로 붕괴되고 1917년 레닌 공산혁명으로 탄생했던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되던 냉전체제가 마침내 종식되고 미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국내에선 민주화 열망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 당선된 노 대통령이 공약한 대로 지방자치제가 부활되어 기초의회와 광역의회 선거가 연달아 실시되었다. 공산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노 대통령의 이른바 '북방외교'는 큰 성과를 냈다. 그해 6월 노 대통령은 미국 방문 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샌프란시스코 체류 소식을 접한 뒤 그에게 밀사를 보내 비밀회담을 했다. 그 결과 고르바초프의 방한과 소련과의 역사적인 수교가 이루어졌다. 같은 해 9월엔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다. 덩샤오핑의 주도 하에 이미 개혁과 개방의 시장경제체제에 들어선 중국과의 수교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당시 남북관계는 그야말로 해빙무드였다. 4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의 현정화와 북한의 이분희가 함께한 '코리아' 단일팀은 여자단체 결승전에서 중국의 마녀들을 꺾고 한반도기를 흔들었다. 12월 13일 개최된 제5차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2주 후엔 '비핵화공동선언'이 발표됐다. 회담에서 북측은 북·미 고위급 회담 개최와 '팀스피릿'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지 약속을 얻어냈다. 반면 남측은 북측으로부터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의한 영변 핵시설 사찰을 약속 받았다. 여러 가지 면에서 최근 남북관계는 1991년의 데자뷔라는 말도 나온다. 

지난해 5월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신북방정책'을 발표해 북·중·러와 유라시아 지역 국가들과의 협력 의지를 표명했다. 6월 전북 무주 태권도원 티원(T1)경기장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는 장웅 북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등 북한 체육계 관계자들과 북한의 국제태권도연맹 시범단이 함께했다. 문 대통령은 개막식에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남북 단일팀을 구성해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의 영광을 다시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남측에서 보수정권이 물러나고 대북 포용정책의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에도 북한이 연달아 미사일을 발사하며 긴장을 조성한 관계로 국민들은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그의 말은 거짓말처럼 현실이 되었다.

2018년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는 전쟁위기로 치닫던 한반도에서 정세변화의 급변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중 정상회담 그리고 6·12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숨가쁜 행진 속에 지금 한반도는 1991년 못지않은 대변혁의 격랑 속에 빠져들고 있다.

불행하게도 1991년의 비핵화 합의는 높아진 불신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일시 중단되었던 '팀스피릿' 훈련은 1993년 재개되고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했다. 1994년 3월 북으로부터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오자 빌 클린턴 당시 미국 행정부는 '작전계획 5027'을 바탕으로 한 영변 핵시설 공격까지 준비하면서 한반도는 전쟁의 문턱까지 갔다. 다행히 그해 10월 북·미 간 제네바합의로 긴박했던 상황은 일단락되었지만 이후 협상은 결실을 보지 못하고 답보를 거듭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은밀하게 핵개발을 계속하고 미사일 산업을 발전시켜왔다.

그동안 북한의 비핵화 협상은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핵개발에 뛰어든 북한의 '시간벌기용' 술책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냉전 해제 이후 압도적 군사력을 앞세워 고압적인 태도로 소위 '불량국가'를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시키고 통제 또는 분쇄하려 했던 미국의 책임도 크다고 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싱가포르 '세기의 담판'은 북한 비핵화에 대한 포괄적인 합의만 있었고 구체성이 결여됐다 해서 갑론을박이 뜨겁다. 하지만 일시불포(一匙不飽)라는 말이 있다. 한 숟갈의 밥으로 배부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수십년간 풀지 못했던 난제를 단 한번의 정상 간 회동을 통해 돌파구가 마련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는 탈냉전 시대를 주도한 20세기의 거물 정치인이다. 두 사람은 당시 첨예한 미·소 간 군비경쟁 체제 속에서도 상대방에 대한 각별한 '신뢰와 교감'을 바탕으로 수차례 만남을 지속하며 핵무기 군축협상에서 성과를 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비핀 나랑(Vipin Narang) 정치학 조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회담에서 북측에 '훌륭한 접근방식(noble approach)'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또 한·미 연합훈련 중단이라는 '큰 양보'를 통해 북·미 양측 모두 진지하게 다음 카드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고 말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교통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악마화되어 있던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북한을 악마화시켜왔던 미국의 대통령으로부터 신뢰를 샀다는 게, 이게 앞으로 동북아 국제정치에 있어서 굉장히 큰,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싱가포르 회담으로 조성된 긍정적인 모멘텀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북한의 비핵화와 체제보장을 둘러싼 추후 협상과정에서 남북 간 또는 북·미 간 관계를 해칠 수 있는 크고 작은 돌출변수들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무기는 무엇보다도 관계국들 간의 신뢰와 교감 그리고 인내심이다. 문 대통령으로서는 미국과 북한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일본 등 주변국들과의 관계도 원만히 유지될 수 있도록 세심한 관리가 요구된다. 한반도를 둘러싼 한·미·일 vs 북·중·러 '신냉전' 구도가 형성되면 한반도 평화는 멀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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