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남진 칼럼]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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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진 아주경제 논설고문
입력 2018-06-08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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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진 논설고문]

4월 22일자 이 난을 통해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싱가포르 강추’라는 칼럼을 썼다. 실제 그리 결정돼 며칠 후면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역사적인 싱가포르 대좌를 지켜볼 수 있게 됐다. 내친 김에 칼럼에서 주문한 대로 핵과 미사일을 깔끔히 치운 뒤 빗장을 열고 나오는 김 위원장의 담대한 결단을 꿈꿔본다.

당시 싱가포르를 회담 장소로 추천한 이유는 김 위원장이 싱가포르의 국부 고 리콴유(李光耀) 총리의 리더십을 배웠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 400달러의 극빈국가를 30년 만에 선진국 수준의 3만 달러로 끌어올린 리 총리의 마법 같은 경제개발정책. 북한에겐 훌륭한 교과서다. 성공의 현장을 직접 답사한 뒤 회담에 임한다면 세기적 선언을 도출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의 도보다리 벤치 대담에서 베트남식 개혁·개방을 추진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위원장은 또 지난 3월 말 베이징 정상회담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게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의 길을 빨리 걸었어야 했는데”라고 아쉬움을 표했다고 한다. 최근엔 대규모 연수단을 파견하여 중국의 개혁·개방 현장을 둘러보게 했다. 노동당 1당 독재체제인 북한으로선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시장 개방에 성공한 중국과 베트남 방식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으리라.

재미있는 것은 두 나라의 개혁·개방 스승이 똑같이 싱가포르 리 총리였다는 점이다. 중국의 덩샤오핑이 싱가포르를 직접 방문해 벤치마킹했고 리 총리를 여러 차례 초청하여 조언을 들었다는 일화는 지난 칼럼에서도 언급했다.

베트남은 더욱 적극적이었다. 1986년 ‘도이모이(쇄신)’ 정책을 채택하고 개혁·개방에 나섰으나 처음엔 큰 진전이 없었다. 이에 당시 총리이던 보 반 키엣이 싱가포르를 방문하여 총리직에서 물러나 있던 리콴유에게 자신들의 경제 고문이 돼달라고 간청한다. 리콴유는 이를 수락하지 않았지만 대신 여러 차례 베트남을 방문하여 도 무오이 공산당서기장 등에게 많은 조언을 해줬다.

그가 1992년 처음 하노이를 방문했을 때 베트남 관리들은 그에게 다섯 개 항목의 질문을 던졌다. 베트남이 어떤 전략상품을 선택하고, 어떤 무역 상대국과 관계를 강화해야 하느냐는 등 구체적인 지침을 듣고 싶어 했다. 리콴유는 “바로 그런 식의 계획경제식 사고로부터 해방해야 한다”고 의식의 개혁을 제1 과제로 꼽았다.

당시 베트남 정관계는 미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게릴라 전사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눈엔 이들의 자부심이 개혁·개방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로 비쳐진 모양이다. 시장경제의 작동원리부터 터득하라고 역설하며 ‘마르크스주의자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게릴라전 같은 방식을 버려라’고 주문했다. “베트남 관리들은 투자자들을 매복지점으로 유인해 전멸시키곤 하던 미국 병사처럼 취급한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해외투자가들이 자진하여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하며, 특히 기존 투자기업의 편의를 잘 봐주는 게 중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외국과의 계약을 멋대로 파기하는 사례를 지적하고 계약의 원칙과 신뢰의 중요성도 가르쳤다. 외국기업의 경영기법과 신기술 도입을 적극 권했다.

그는 자서전 ‘일류국가의 길’에서 “고위 관료들은 여전히 베트남 개방 후에 찾아올 사회적 병폐와 정치적 권력의 상실을 두려워해 자유화를 늦추고 있었다”고 술회했다. 게릴라 전사 출신의 관료들을 젊은 세대로 교체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리콴유가 살아있다면 현재의 북한을 어떻게 진단하고 어떤 조언을 해줄까.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나설 때 최대 관건은 3대 세습으로 이어진 수령 전제체제라고 본다. 개혁·개방의 요체는 대외 경제교류와 시장경제시스템 도입인데 이는 수령 전제체제와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개방정책에 성공하는 길. 김정은이 절실히 찾는 해법이겠지만, 리콴유라면 “그런 길은 없다”고 답한 뒤 베트남에서와 똑같이 ‘시장마인드 의식 개혁’을 주문할 것 같다.

소련 해체 뒤 카자흐스탄의 대통령 경제고문으로 개혁·개방 작업을 담당했던 방찬영 키메프대학 총장(82)은 전체주의 체제에선 시장 개방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그는 ”경제 현대화는 생산 수단의 사유화, 경제 활동 자유화, 노동시장 자율화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북한이 살려면 먼저 공식 지도 이념을 버려야 한다. 정치개혁이 선행돼야 경제개혁이 된다”고 강조했다.

개혁·개방을 위해선 수령 전제체제의 궤도수정이 불가피하지만, 그건 북한을 지탱해온 기둥뿌리를 흔드는 일이다. 자칫 체제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딜레마를 풀어내는 일. 김정은에게 주어진 난제다. 과연 그가 미로의 숲을 헤쳐 나와 글로벌 시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인지. 12일 싱가포르 회담의 성패도 김 위원장이 그 딜레마의 해법을 찾아냈는지에 좌우될 걸로 본다.

회의적 전망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한편에선 핵탄두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성공의 자부심을 앞세워 수령 독재체제를 더욱 굳히고 국제사회를 계속 기만하는 역주행을 떠올리기도 한다. 리콴유가 베트남 개혁·개방의 걸림돌로 관료들의 대미(對美) 전쟁 승리 자부심을 꼽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는 회담이 깨지고 한반도에 재앙이 닥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그나마 김정은이 스위스에서 수년간 유학한 경험에 한가닥 희망을 가져본다. 그때 익힌 국제감각으로 ‘선(先)정치개혁’을 연착륙시키는 묘수찾기에 성공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명구(名句)가 떠오른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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