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 개성공단 재가동하고, 미국은 시장 열어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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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아주경제 논설고문
입력 2018-06-0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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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아주경제 논설고문 겸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트럼프가 김정은을 싱가포르로 불러낸 것은 전략가로서의 면모가 엿보인다. 트럼프의 원래 구상에 판문점이나 평양 정상회담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적지(敵地)에서의 협상은 기 싸움에서 한 수 밀리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판문점은 ‘문재인 따라가기’라는 인상을 줘 트럼프의 취향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2011년 권력을 승계한 후 최장거리의 여행에 나선 김정은보다 트럼프가 심리적으로 우위에 섰다고 할 수 있다. 참매 1호의 비행거리 안에 있는 자유와 번영의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김정은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회담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김정일과 김정은 부자는 둘 다 비핵화가 김일성의 유훈(遺訓)이라고 말한 적이 있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김일성의 핵 집착은 6·25 전쟁 때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김일성은 1970년대 중반부터는 ‘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를 언급하기 시작했지만 비핵화 구호를 내세워 미국과 중국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술수였다고 태영호는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증언한다.

1975년 4월 베이징 회담에서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조선은 핵무기를 가질 꿈도 꾸지 마라. 중국이 독자적으로 핵을 개발하면서 소련과의 관계가 나빠지고 경제가 악화돼 수천만명이 굶어죽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평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측근들에게 “마오쩌둥이 나한테 이야기하는 걸 들었지? 우리가 핵무기 만드는데 가장 큰 적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3층 서기실의 암호).

김정은이 김일성, 김정일의 진짜 유훈인 핵 개발을 포기하겠다고 나온 데는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운 트럼프의 역대급 협박과 국제사회의 제재로 인한 경제 파탄이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 상공과 해역에 북한을 초토화할 수 있는 미국의 전략 자산이 전개될 때마다 김정은은 잠수를 탔지만 잠을 설쳤을 것이다.

트럼프의 압박에 못지않게 북한 내부로부터의 압력도 거세지고 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부터 형성된 북한의 장마당 사람들은 보안원(경찰)과 싸움도 주저하지 않는다고 한다. 북·미정상회담이 실패로 돌아가 제재가 강화되고 장마당이 돌지 않는다면 내부의 폭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정은이 북·미회담을 앞두고 군 서열 1~3위를 모두 경질한 것도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새로 총참모장(한국의 합참의장)이 된 리영길은 물러나는 리명수보다 21살이나 젊은 세대교체 인사다. 군에서 전술보다는 경제를 다룬 인사들이 중용됐다. 북·미대화와 비핵화 협상을 앞두고 군(軍)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아버지 세대를 내친 것은 우리 쪽 시각에서도 긍정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북한의 백두혈통 3대는 한국과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을 상대로 번번이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를 썼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정은과 트럼프로 무대의 주역이 바뀌었고 한국에도 진보정권이 들어섰다. 새로운 변화를 기대해볼 수도 있지만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까지 가기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다.

북한에는 6·25 전쟁 때부터 건설된 수만 개의 땅굴이 있다. 김정은은 핵탄두를 20개 정도 내놓고 나머지는 땅굴에 숨겨놓을 수 있다. 북한이 6차에 걸친 핵실험을 통해 확보한 기술과 연구인력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급해지니까 비핵화를 들고 나오긴 했지만 트럼프 임기에 시간 끌기를 하자는 전략일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 노벨상과 중간선거용 성과물에 집착한 트럼프가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의 합의 수준에 만족한다면 한국이 가장 우려하는 상황이 된다.

그런 우려를 염두에 두더라도 북의 핵 개발을 동결시키고 국제기구가 북핵을 사찰할 절호의 기회를 이대로 흘려 보낼 수는 없다. 이것도 트럼프의 현실감각과 문재인 대통령의 거간이 만들어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 8년과 한국의 보수정권 9년이 겹쳐지면서 대화가 막혀 있는 기간에 북한의 핵탄두 수는 계속 늘어났다. 북한의 핵이 계속 증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하는 시점이다. 북한에 속고, 속지 않고는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미국과 한국이 하기에 달렸다.

싱가포르 회담에서 북한이 CVID의 큰 그림을 천명한다면 한국으로서는 개성공단을 재가동하는 것이 첫 번째 과업이 될 것이다. 개성공단은 북한 주민에게 시장경제를 가르치는 학습장이다. 트럼프는 말로만 생색을 내지 말고 진심으로 북한의 ‘경제적 번영’을 지원할 의사가 있다면 개성공단 제품에 대해 미국시장을 활짝 열어주는 언행일치를 보여야 할 것이다. 핵을 포기하고 시장의 길로 나아가려는 북한 내부의 힘을 키워주어야 CVID가 탄력을 받을 수 있다.

일주일 후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북·미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 문제는 “협상 대상이 아니며, 돼서도 안 된다”는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부 장관의 답변이 정답이다. 중국을 최대 경쟁국으로 상정하고 견제하는 미국이 주한미군과 사드를 빼내 중국의 군사전략을 도와 주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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