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유사삼매(類似三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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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06-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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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가 수트라 I.19

 

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


공평
인생은 불공평하다. 우리는 자신이 우연히 처한 운명적인 상황이 불공평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누구는 부잣집에서 태어났고, 누구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기 마련이다. 누구는 건강하게 태어나고 누구는 허약하게 태어난다. 그러나 우리가 부자나 건강의 기준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기준은 작위적이며 상대적이다. 나는 나보다 돈이 많은 사람보다는 가난하고, 돈이 적은 사람보다는 부자다. 나는 나보다 건강한 사람보다 허약하지만, 나보다 허약한 사람보다 건강하다. 나의 행복의 기준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비교(比較)’를 통해 마련하면 나는 항상 가난하다. 내 행복의 기준이 TV나 신문에 등장하는 부자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항상 남과 비교하는 사람에겐 인생은 고통이다.

‘인생은 공평하다’라는 문장도 역시 옳다. 내가 태어난 환경은 나만의 미래를 만들기 위한 수련장이다. 나는 나의 미래를 내가 원하는 삶으로 만들 것이다. 나는 부자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혹은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위해 내가 지금 노력하기 때문이다. 나는 건강하다. 오늘 하루,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신체와 정신 운동을 마쳤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강과 지식을 얻기 위해 성현들의 책을 보거나 스승을 찾아갈 것이다. 내 삶의 기준을 내가 정할 것이다. 그러기에 내 삶은 나에게 ‘아주 공평’하다. 어떤 사람은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을 때,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다. ‘요가 수트라’ I.19는 수련 없이 쉽게 삼매에 진입하는 자들에 관한 내용이다. 예로부터 아무런 수련 없이 특별히 영적이며 정신적인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예언자’란 이름으로 불렀다.

세 종류의 예언자
고대 이스라엘에는 세 종류의 예언자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등장한 예언자는 ‘샤먼(shaman)’과 같은 존재로 흔히 ‘점쟁이’라고 불렸다. 이런 예언자들은 히브리어로 ‘보는 사람’이란 의미로 ‘로에(roeh)’라고 불렸다. 그(녀)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다. 로에는 아마도 구석기 시대부터 존재해온 가장 오래된 종교인일 것이다.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는 국가의 특별한 일을 거행하기 전 점을 쳤다. 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본다거나 양을 도축하여 그 간의 모양을 보고 길흉화복을 점쳤다. 그래서 길조(吉鳥)라는 말이 생겼다.

그리스 델피에서 신의 신탁을 받아 인간에게 전달하는 ‘시빌(sibyl)’도 발전된 형태의 점쟁이다. 시빌은 신탁을 원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스스로 몰입하여 지하세계의 신들로부터 계시를 받아 말한다. 지하세계의 신들은 시빌의 정신을 잃게 만드는 지하가스를 통해 의도를 전달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로에나 그리스의 시빌은 이후에 등장한 전문적인 예언자들에 의해 대치됐다.

두 번째 부류의 예언자는 우여곡절을 겪은 후, 신의 말을 전달하는 대변자가 된 사람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이들을 히브리어로 ‘나비(nabi)’라고 불렀다. 나비라는 단어의 축자적인 의미는 ‘(신으로부터) 말을 전달받은 사람’이란 의미다. 나비는 자신이 신의 말을 직접 들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항상 “신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라는 관용 어구를 사용한다.

고대 그리스에는 ‘오이디푸스 왕’에 등장하는 ‘티레시아스(Tiresias)’와 같은 존재다. 전설에 의하면 티레시아스는 목동과 요정의 아들로 아테나 여신이 목욕하는 것을 봤을 때 장님이 됐다. 아테나 여신은 그를 불쌍히 여겨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인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줬다. 티레시아스는 육체적으로는 장님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미래와 신의 뜻을 볼 수 있는 자다.

세 번째 부류의 예언자는 스스로 노력하여 만물을 심오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이들을 히브리어로 ‘호제(hozeh)’라고 불렀다. 이 별칭으로 처음 불리기 시작한 예언자는 기원전 7세기 아모스다. 아모스는 평범한 목동이자 농부였다. 그러나 그는 사시사철 자연의 흐름에 따라 곡식과 과실이 생멸하는 과정을 두 눈으로 확인했고 가축의 생로병사를 보면서 생명의 신비를 이해했다. 자연과 동물은 그의 구루였고 그들의 변화를 섬세하게 감지하는 것이 그에게 수행이었다.

호제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의 문법을 읽는 능력의 소유자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철학자’들이 등장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오감으로 인식한 세계는 현상이지 원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원리는 현상 밑에 감추어진 ‘이데아(idea)’ 세계에 있다. 이데아를 파악하는 능력을 그리스어로 ‘소피아(sophia)’ 즉 ‘지혜’라고 불렸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검증과 깨달음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과정을 ‘프락시스(praxis)', 즉 ‘연습’이라고 불렀다.
 

프란체스코 바치아카(1494–1557) [사진=오스트리아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두 종류 요가수행자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19와 I.20에서 두 종류의 요가수행자를 소개한다. 첫 번째 종류 수행자는 요가수트라 I.19에서 다소 난해한 ‘비데하스(videhas)’와 ‘프라크릴리야스(prakrtilyas)’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삼매경을 요가수트라에서 자세히 설명한 대로 규칙적인 자기 훈련을 통해 진입하지 않는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이들은 남들처럼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수련을 통해 삼매에 입장하지 않고 태어날 때부터 특별하게 노력하지 않고 쉽게 삼매경에 진입한다. 두 번째 종류 수행자는 요가수트라 I.20에 등장한다. 이 수행자의 삼매경은 정규적인 수련의 결과다. 그는 정규적 수련을 통해 알게 모르게 습득되는 ‘믿음’ ‘힘’ ‘기억’ 그리고 숭고한 지성을 지닌다. 이들은 정통 요가 수행자들이다.

요가수트라 IV.1은 정통 요가 수행자들이 다음 네 가지 방식으로 영적인 훈련을 통해 얻는 ‘시디스(siddhis)’를 쟁취한다고 기록한다. 시디스는 출생, 약초, 주문, 그리고 삼매의 결과다. 시디스는 자신, 타인 그리고 자연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다. 파탄잘리는 네 가지 부류의 수행자를 기술한다. 첫 번째 부류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그런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두 번째 부류는 약초에 들어간 환각제를 복용해 특별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세 번째 부류는 주문을 반복적으로 외워 스스로 남들이 접근할 수 없는 미로에 들어가 깨닫는 사람이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부류는 요가수트라에 기록된 내용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만들어 습관화해 인내와 불굴의 노력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깨달은 사람이다. 첫 번째에서 세 번째 부류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 밖의 도움을 통해 특별한 능력을 소유한다. 이들의 능력은 지속적이지 않기에 믿을 수 없다. ‘원인과 결과’라는 우주를 지탱하는 원칙을 저해하는 예들이다.

유사삼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19에서 자신이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영적인 능력의 소유자들을 소개한다. “바바 프라트야요 비데하 프락리티 라야남(bhava-pratyayo videha-prakr̥ti-layānam)” 이 문장을 번역하면 이렇다. “비데하와 프라크릴라야스는 태생이 원인이다” 학자들은 요가수트라 I.20에서 언급된 수행자의 요건은 그 뜻이 명확하지만 I.19에서 언급되는 산스크리트어 단어들, 즉 ‘바바(bhava)’, 비데하스와 프라크릴라야스의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다.

비데하스는 축자적으로 ‘몸(deha)으로부터 분리된(vi) 존재’라는 의미다. 비데하스는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 고대 이스라엘의 로에 혹은 고대 그리스의 시빌과 같은 존재로 태어나면서부터 저 너머의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영매(靈媒)를 의미한다. 이들은 종종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들이 자신의 몸과 정신에 신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한다. 예를 들어 무녀(巫女)들이 신 내림 굿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 말하는 경우다. 비데하스는 쉽게 황홀경으로 진입한다. 비데하스는 수련이 아니라 특별한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특성으로 삼매경에 진입한다. 파탄잘리는 이 삼매는 지속적일 수 없기 때문에 유사삼매로 본다.

프라크릴라야스는 요가수련을 통해 참다운 자신의 상태인 ‘푸루샤’에 진입하지 못하고 자연 상태의 자성(自性)에 안주하는 사람이다. 이들도 가짜 요가 수련자로 겉으로는 삼매경에 진입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자들의 능력은 윤회를 통해 설명가능하다. 이들은 전생에서 요가를 수련했지만 해탈(解脫)을 경험하고, 다시 태어난 존재들이다. 이들은 과거의 전생으로부터 부여된 능력을 발휘한다. 세상은 공평하다. 오늘 내게 주어진 시간과 장소를 나를 위한 최선으로 만드는 수련만이 나를 삼매로 인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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