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유상삼매경(有相三昧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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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05-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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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가 수트라 I.17

 

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


삼매경
나의 삶을 혼미하게 만드는 잡념들은 마음속 깊이 위장해 잠복근무 중이다. 내가 요가수련을 통해 일과를 거룩하게 완수하기 위해 몰입하면, 이 잡념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숨어 호시탐탐 자신들이 활동할 기회를 염탐한다. 내가 수년간 쓸데없는 생각들을 제거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항상 나의 완패로 끝난다. 내가 조금만 느슨하게 마음을 풀어도, 그들은 어느새 등장해 먼저 내 생각을 장악한 후, 내 말과 행동을 순식간에 조절한다. 나는 종종 잡념의 포로가 돼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닌 다른 길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가고 싶은 길 위에서 차근차근 정진하지 못하고, 길을 잃고 분명히 후회할 일을 하는 자신을 보면서도, 나는 원래 내가 있어야 할 장소와 시간을 회복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그런 나를 방치한다. 잡념은 나를 존재하게 하는 ‘나 다운 나’라는 내 생각을 조절하는 중앙조절장치를 점령하여 어쩔 수 없게 만든다. 나는 실수와 후회를 경험한 후에, ‘내가 가고자 했던 길’로 다시 돌아온다

요가는 수련이며 훈련이다.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세계적인 예술가들이나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은 남다르다. 그들은 완벽한 예술과 기량을 이루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련한다. 그들은 고백한다. “제가 3일 동안 연습하지 않으면 관객들이 안다. 2일 동안 연습하지 않으면 비평가들이나 코치가 안다. 그리고 제가 연습을 하루 거른다면, 그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하지만, 나 자신이 안다.” 최고의 선수와 나머지 선수와의 차이는 바로 ‘하루 연습’이다. ‘하루 연습’이란 자신의 현재, 지금 이 시각을 자신이 원하는 원대한 꿈을 위해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마음가짐이며 행동이다.

파탄잘리는 요가 수련을 통해 마음속에 일어나는 잡념들을 소멸시킨 후, 수련자가 입장해야 할 구별된 공간이 있다고 말한다. 그 공간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거룩한 공간이다. 사람들은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믿는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을 눈으로 봤다고 말하지만, 그가 본 것은 대개 자신의 이기심과 편견이라는 색안경으로 본 왜곡된 ‘그것’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류 문화의 문명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냄새 맡을 수 없고, 맛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발견함으로써 시작됐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에베레스트산보다 높은 산이 숨겨져 있다. 나일강보다 더 긴 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고 대서양보다 넓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바다도 있다. 우리는 많은 돈, 시간, 그리고 수고를 들여 들과 산으로 여행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속에서 발견되고 발굴되기를 원하는 절경이나 보물들을 외면한다.

인간은 요가 수련을 통해 오감으로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경지 안으로 들어선다. 이 경지가 바로 ‘삼매경(三昧境)’이다. 자신의 마음을 한데로 모아 몰입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신비한 공간이다. 파탄잘리는 삼매경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기술한다. 하나는 그 안에 인식의 대상이 존재하는 ‘유상삼매경(有相三昧境)’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으론 경험할 수 없는, 혹은 그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무상삼매경(無相三昧境)’이다. 전자를 ‘삼프라즈나타(saṁprajñāta)’라고 부르고 후자를 ‘아삼프라즈나타(asaṁprajñāta)’라고 부른다. ‘삼프라즈나타’는 ‘와 함께’라는 접두사 ‘삼(sam)’과 ‘완벽하게, 깊이, 미리’라는 의미를 지닌 ‘프라(pra)’, ‘알다’라는 의미의 동사 ‘즈나(jñā)’, 그리고 명사형 어미인 ‘타(ta)’가 모여 만들어진 합성어다. ‘삼프라즈나타’의 의미를 쉽게 풀어 설명하면 ‘어떤 대상을 완벽하게 아는 상태’이다. 요가수련은 자신이 몰입한 대상에 대한 깊은 앎을 깨닫는 과정이다. ‘안다’라는 가장 흔하지만 중요한 동사는 거의 모든 언어에 존재한다.
 

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해변가 수도승'. [사진=독일 베를린 구국립박물관]


지식
‘앎’이란 무엇인가? 서양의 모든 언어를 파생시킨 가상의 언어 원-인도유럽어 ‘PromoProto Indo-European’에서 ‘안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는 ‘그네’다. 어떤 사실을 인식하고 자신의 지식 안으로 수용하는 과정은 한 번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친 반복이다. ‘그네’는 오히려 오랜 수련과 숙달을 통해 자신이 보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정통한 상태의 유지다. ‘그네’는 문법적으로 ‘행동’을 의미하는 동사라기보다는 ‘반복된 행동으로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있는 상태’를 뜻하는 형용사에 가깝다. 예를 들어 ‘내가 산스크리트어를 안다’라는 문장을 생각해 보자. ‘산스크리트어를 안다’라는 명제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산스크리트어를 아는 사람은 적어도 다음과 같다. 그(여자)는 산스크리트어 문자를 오랫동안 손과 눈으로 익혀 한 글자 한 글자를 구별하고 발음할 수 있다. 그는 그 문법을 적어도 2~3년 동안 하루에 2시간 이상 공부했으며, 기본적인 문장들을 산스크리트어 사전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번역할 수 있다. 그는 인도 서사시 마라 바라타 안에 수록된 ‘바가바드 기타바가바드기타’나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의 원전을 공부해 그 문장들을 초보적인 수준에서 번역할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이 ‘내가 산스크리트어를 안다’라는 문장이 내포한 최소한 의미들이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17의 삼매경에서 발견되는 지식인 ‘삼프라즈나타(saṁprajñāta)’ , 즉 ‘완벽한 지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비타르카 비차라 아난다 아스미타 루파 아누가마트 삼프라즈나타(vitarka vicāra ānanda asmitā rupa anugamāt saṁprajñātaḥ).” 이 문장을 번역하면 “요가 수련을 통해 삼매경으로 입장하면 완벽한 지식이 존재한다”라는 의미다. 완벽한 지식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단계를 통해 대상의 핵심을 알 수 있다. 첫째, ‘비타르카(vitarka)’, 즉 대상의 표면적인 모습을 완벽하게 인식하기. 둘째, ‘비차라(vicāra)’, 즉 대상의 심층적인 움직임까지 완벽하게 포착하기. 셋째, ‘아난다(ānanda)’, 즉 대상을 통해 얻는 희열을 만끽하기. 넷째, ‘아스미타(asmitā)’, 즉 ‘나는 내가 원하는 자신과 합일되는 상태’를 유지하기다.

유상삼매경에 진입하기 위해서 파탄잘리는 제일 먼저 ‘비타르카’, 즉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심오(深奧)한 관찰’을 소개한다. ‘비타르카’는 ‘깊이 숙고하다’라는 산스크리트어 동사 ‘타르크(tark)’에 강세접사 ‘비(vi)’가 접두해 만들어진 단어다. 요가수련자는 사물이나 사물을 자신의 눈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하는 상황과 존재하는 의미와 그 대상의 입장에서 파악한다. 예를 들어 내가 오늘 만날 어떤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내가 그 사람을 나의 이익을 위해 만난다면, 그 사람과 만남이 왜곡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나는 그의 입장과 나의 입장이 절묘하게 마주치는 지점을 상상하고 상호 간의 최선을 위한 접점을 찾는다.

두 번째 유상삼매경의 단계는 ‘비차라’다. ‘비차라’는 ‘섬세(纖細)한 관찰’이다. ‘움직이다’라는 산스크리트어 동사 ‘차르(car)’와 강세접사 ‘비’가 접두해 만들어진 단어다. ‘비차라’는 요가수련자의 명상의 대상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속 모습까지 헤아리려는 마음이다. 내가 어떤 대상을 진실로 대하고 상대방과 나의 희로애락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요가 수련자는 섬세한 관찰을 통해, 그 대상의 미세한 떨림까지 감지하는 능력자다. 그것은 마치 올림픽에 나간 궁수의 마음가짐과 유사하다. 그(녀)가 활쏘기 수련을 시작했을 때, 과녁이 불과 몇 미터 앞에 있다고 할지라도 과녁의 중심을 맞추기 어렵다. 오랜 연습과 훈련을 통해 활 쏘는 자세뿐만 아니라 호흡도 마음대로 조절하게 되면, 25m 떨어진 과녁을 3m 앞 과녁처럼 섬세하게 볼 수 있다. 궁수는 활시위를 당겨 활을 쏘려는 순간, 풍향의 방향과 세기까지 헤아릴 수 있게 된다. ‘비차라’는 명상의 대상에서 겉모습을 걷어내고 핵심을 명약관화하게 볼 수 있는 ‘깨달음’이다.

세 번째는 ‘아난다’다. ‘아난다’는 심오하고 섬세한 관찰을 통해 요가수련자가 얻는 것이다. ‘아난다’는 ‘행복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난드(nand)’와 접두어 ‘아(a)’의 합성어다. 요가수련자는 명상을 통해 스스로 더욱더 순수하고 정결하며 자족할 수 있는 단계로 진입해 유유자적한다. 그는 깨달음을 통해 한없는 행복을 누리지만 스스로 절제해 요가수련에 전념하는 상태에 든다. 그는 인간의 의식의 최고의 단계로 진입해 태연자약(泰然自若)하다.

네 번째 단계는 ‘아스미타’다. ‘아스미타’는 ‘나는 –이다’라는 산스크리트어 동사 ‘아스미(asmi)’와 명사형 어미 ‘타(ta)’의 합성어로 ‘나의 나됨’이다. 내가 나 자신이 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요가수련을 통해 삼매경으로 진입해 가장 깊은 곳에서 찾는 보물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매일 되고 있다’라는 의식이다. ‘아스미타’는 철학자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보다 심오하고 친절하다. 요가수련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가 간절히 원하는 나를 발견하고, 그런 나를 내 삶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끊임없이 수련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나를 위해 지금 이 장소에서 수련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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