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생존자 "군홧발에 질글질근 밟혀…아직도 팔다리 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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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용 기자
입력 2018-05-17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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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책임자와 헬기사격 명령자 나왔으면"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계엄군이 군사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하는 학생들의 손을 뒤로 묶고 전남도청으로 연행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5·18 광주민주화운동 38주기를 하루 앞두고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생존자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사건 당시 겪은 폭행 후유증으로 생존자 남승우 씨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남 씨는 17일 cpbc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김혜영입니다'에 출연해 "밥도 적게 줬지만, 밥이 문제가 아니라 내 이름 석 자만 안 불리면 좋겠다는 게 제일 소원이었다"고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던 경험을 털어놨다. 당시 21살의 샷시공이었던 남 씨는 퇴근길에 고등학생의 주검을 목격하고 시민군에 합류했다. 그는 도청에 있는 미확인 시신을 확인하는 일을 하다가 시내 치안유지를 담당하는 시민군 기동타격대 역할을 맡았다.

남 씨는 "잡히기 전에 총을 창문 사이에 대고 있었다. 군인을 봐도 못 쏘겠더라. 그래서 총을 방바닥에다 던져버리고 잡아가려면 잡아가라고 누워있었더니 계엄군이 방에 들어왔다"며 "처음 막 잡혔을 때 군홧발로 하여튼 무지하게 맞았다"고 검거 당시의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

군인들의 구타는 감옥에서도 이어졌다. 남 씨는 "곤봉으로 때리다가 힘들면 사병을 시켰다. 사병이 우리들을 서서히 때리면 자기가 사병을 때렸다. 그러면 사병은 자신이 안 맞기 위해 힘껏 때릴 것 아니냐. 그래서 영창 안에 잡히면서부터 엎드려 있는데 워커 발로 허리고 머리고 질글질근 다 때렸다"고 얘기했다.

출소할 때 남 씨의 몸 왼쪽에 마비가 왔다. 그는 사건 이후 38년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당시 군홧발에 짓밟혔던 팔다리의 마비 증상으로 지금도 약물 없이는 일상생활이 어렵다.

그는 "항시 몸이 아픈 상태라 마음이 착잡하고 괴롭다"며 "지금은 보훈병원에서 공짜로 치료도 해주지만, 돈이 없으니깐 병원에 입원하고 싶어도 입원도 못한다. 작년 9월에서는 뇌경색으로 한 달간 입원하다가, 11월에 무지개병원에서 3개월 입원하고 2월에 퇴원했다"고 언급했다.

남 씨는 5·18 피해자들이 보상금과 연금을 받고 호의호식한다는 소문에 속상함을 드러냈다. 그는 "당시 보상을 받고 그 후로 저희는 아직 연금이나 보상을 받은 것이 없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는 "보상은 전체 다해서 1억원을 받았다. 보상이 90년도 초에 나왔는데 거의 70~80%는 4000만원을 받았다. 10년이라는 세월인데 그 4000만원 갖고 되겠냐"며 "그 뒤에는 복지 차원에서 시에서 8만원씩을 주다가 이번에는 10만원씩 주는데 10만원 가지고 생활 못한다"고 말했다.

남 씨는 이날 "제일 필요한 것은 총책임자였던 전두환이 자기 입에서 내가 책임자로서 모든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라며 "헬기 사격 발포 명령자들 그분들이 좀 나왔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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