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 상흔 치유에 헌신한 老학자의 진솔한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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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이재호 특파원
입력 2018-05-0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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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젠화 베이징대 총장. [사진=바이두 캡처]


중국 문화대혁명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6년.

낙후한 네이멍구 자치구 내에서도 벽지로 손꼽히는 바다얼후 농장에서 일하던 18세 소년 린젠화(林建華)는 '공농병(工農兵)' 특례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얻었다.

노동자와 농민, 병사의 재교육을 위한 제도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도 1975년 이 제도를 통해 시험을 치르지 않고 칭화대 화공과에 입학한 바 있다.

당시 바다얼후 농장 간부가 다른 이에게 기회를 주면서 린젠화의 첫 대입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린젠화는 "그 때 내가 선택을 받았다면 인근 사범대학에 진학한 뒤 교편을 잡았다가 지금은 은퇴를 했을 것"이라며 "손해를 보는 게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질 때도 있는 법"이라고 회고했다.

2년 후인 1978년 린젠화는 대학 입학시험을 통과해 베이징대 화학과에 들어갔다.

같은 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독일·미국 유학 생활까지 마치고 돌아온 그는 1986년 교수로 임용됐으며 2015년 베이징대 총장직에 올랐다.

린젠화 총장은 최근 구설에 휩싸였다. 지난 4일 열린 개교 120주년 기념식에서 훙후(鴻鵠·큰 기러기와 고니)를 훙하오(鴻浩)로 잘못 읽은 것이 발단이었다.

훙후는 중국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기본적인 어휘로,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한다. 진나라 때 농민 반란을 주도한 진승(陳勝)이 "제비나 참새 따위가 큰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燕雀安知鴻鵠之志·연작안지홍곡지지)"라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

이후 베이징대는 물론 온라인 공간에서도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중국 최고 명문 대학의 총장이 중학생 수준의 어휘도 구사하지 못한다는 비판과, 이번 사건으로 린 총장이 기초과학과 교육행정 분야에서 쌓은 업적까지 폄훼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 맞섰다.

린 총장은 개교 기념식 다음날인 5일 교내 인트라넷에 장문의 편지를 올렸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 기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실수를 했다는 진솔한 반성과 함께 "현실에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미래로 향하자"는 메시지를 던졌다.

중국 작가 천다(陳達)는 소설 '중국의 아들'에서 "문화대혁명으로 학교는 문을 닫고 학생들은 교사를 구타했다"며 "교정은 책을 불태우는 야만스러운 공간으로 변했다"고 묘사했다.

1955년생인 린 총장은 이같은 교육 환경에서 초·중·고교 시절을 보냈다. 린 총장은 "내가 받은 교육은 완전하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았다"며 "마오쩌둥(毛澤東) 선집과 공산당 간부 교육용 사회주의 교과서만 반복해 읽었을 뿐"이라고 토로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에서 전문가 그룹을 소멸시켰다. 특히 과학·기술·교육 부문의 퇴보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린 총장은 X선을 활용한 분자·원자 구조 분석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학계에서 널리 통용되는 'PKU(베이징대의 약칭)' 분석법은 그가 거둔 성과 중 하나다. 중국의 기초과학 발전을 이끈 학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0년에는 모교를 떠나 충칭대 총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2013부터 2년 동안 저장대 총장을 역임했다.

이 기간 중 그는 중국 학계의 '꽌시(關係)' 혹은 '순혈주의'를 끊어내는 데 주력했다. 그 노력을 인정받아 국가급 교육성과 1등상을 받기도 했다.

어휘와 어법은 중국 사회가 원하는 수준에 못 미칠지라도, 과학과 교육 부문에 깊이 남은 문화대혁명의 상흔을 치유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후싱더우(胡星鬪) 베이징이공대 교수는 "(린 총장의) 저급한 잘못은 중국 지식인의 문화적 소양의 단층과 시대적 비극을 반영한다"며 "지금의 베이징대는 더이상 예전의 베이징대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익명을 요구한 한 중국 대학의 교수는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어렵게 성장해온 학자들의 비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며 "그들은 후학들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중"이라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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