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삼매(三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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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04-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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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가 수트라 I.17

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



요가 수련을 통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던 다섯 가지 잡념들이 잠잠해진 후, 소멸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내가 호수 바닥에 있는 나의 참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나는 무엇을 경험할까? 잡념 소멸의 결과는 현실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드는 황홀경(恍惚境)이 아니다. 요가 수련의 결과는 요가 수련자의 의식이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을 기꺼이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적용하려는 열린 마음의 상태다. 이 상태를 ‘삼매경(三昧境)’이라 부른다. 삼매경은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ādhi)’의 음역이다. ‘사마디’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sam) 매순간 적소(適所)에 몰입하려는(dhi) 간절한(a) 마음’이다. 마음 속에 일어나는 잡념의 소멸은 삼매경으로 진입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사마디’란 단어 안에는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추구해온 삼라만상의 운행원칙과 그 안에서 생존하는,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이 추구해야 할 고귀한 가치가 숨어 있다. 그것이 바로 ‘사마디’란 단어의 말미에 적힌 ‘디(dhi)’이다.

기원전 12세기
‘디’의 의미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산스크리트어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가 속한 어군에서 동일한 단어(혹은 어근)가 어떻게 사용됐는가를 봐야 한다. 만물이 변하듯 중요한 개념을 지닌 단어도 시간이 지나면 모습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변한다. 19세기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면서 언어학자들은 인간 문화의 핵심인 언어를 연구하는데 진화론적 방법론을 사용한다. 19세기 역사 언어학자들은 인간의 언어는 한 조상언어에서 파생됐고, 그 조상언어에서 후대에 파생된 개별언어로의 이행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 학자들을 ‘신문법학자’라고 부르고 이들의 주장을 ‘신문법학자 가설’이라고 칭한다. 이 언어학자들은 언어의 역사적 변화에 주목한다.

단어들도 다른 만물처럼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원래 지녔던 의미가 사라지고 부차적인 의미만 지니기도 한다. 산스크리트어가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12세기로 추정된다. 그 전에 분명히 말로 존재했지만, 문헌으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12세기다. 기원전 12세기는 인류에게 특별하다. 이 시기에 인류는 각 지역에서 문명권(文明圈)을 형성하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노래로 읊어 자신만의 정체성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인도에서는 ‘리그베다’(Rig Veda)가, 이란에서는 ‘아베스타’(Avesta)가, 팔레스타인에서는 히브리 성서 중 가장 오래된 부분인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노래가, 그리스에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우스’가 음유시인들에 의해 불렸다. 특히 인도의 ‘리그베다’와 이란의 ‘아베스타’는 그 내용과 언어가 매우 유사해 까마득한 옛날엔 사용자들이 하나의 언어를 사용한 집단이란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학자들은 이 가상의 집단을 ‘인도-이란인’이라고 부른다.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바닷가 수사' [사진=베를린 내셔널 갤러리(구국립미술관)]


‘하르’
인도와 이란을 하나로 묶는 어근이자 개념이 있다. 바로 *arya-다. 아리야가 낳은 무념이 바로 인도문명과 이란문명이다. 아베스타 단어 ‘아이르야(airya)’와 고대 페르시아어 ‘아리야(ariya)’는 모두 ‘숭고한, 존경받을 만한’이란 의미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을 완성한 다리우스 대왕(기원전 5세기)은 자신의 치적을 새긴 비시툰 비문에서 자신을 ‘아리아인’이라고 선포했다. 베다 산스크리트어에서도 ‘아르야(árya)’란 단어는 ‘신앙심이 좋은, 충성스런’이란 의미다. 특히 베다신앙심이 깊은 사람을 이르는 용어다. ‘아리아’란 단어를 인도인들과 이란인들이 사용하기 전 단계인 원-인도유럽어(Proto-Indo-European)로 재구성하면 ‘하르(*h2ar-)’다. ‘하르’는 역사상 존재하지는 않지만, 이란어 ‘아리야’와 산스크리트어 ‘아르야’가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 이전 언어의 모습이다. 서양인들의 조상인 인도-유럽인들은 아마도 기원전 4000년경 하나의 집단으로 존재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학자들은 이런 존재하지 않는 단어라는 표시로 단어 앞에 별표시를 한다.

하르의 기본적인 의미는 ‘우주의 질서에 맞게 정렬하다, 하나로 조합하다’이다. ‘하르’에서 파생된 개념이 각각 힌두교와 조로아스터교의 핵심사상이 되었다. 산스크리트어 ‘르타(Ṛta)’라는 단어는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을 조화롭게 조절하는 원칙이다. ‘르타’는 인도 유럽어 어근 ‘하르’의 과거분사형으로 그 의미는 ‘우주의 원칙에 맞게 조합된 것’이다. 르타는 ‘진리, 법, 질서, 운명’ 등으로 번역된다. ‘르타’가 사회에 적용되면 ‘다르마(dharma)’가 되고 개인에게 적용되면 ‘카르마(karma)’가 된다. ‘다르마’와 ‘카르마’는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각각 ‘법(法)’과 ‘업(業)’으로 번역됐다. ‘하르’는 이란에서 ‘우주의 원칙’을 의미하는 ‘아사(aša)’가 됐다. ‘하르’의 과거분사형인 ‘*h2art-’는 고대 이탈리아로 넘어가 중요한 문화 개념어인 라틴어 ‘아르스(ars)’가 됐다. ‘아르스’는 흔히 ‘예술’이라고 번역하는데, 그 원래 의미는 ‘우주와 조화를 이루기 위한 최선’이다. ‘예술’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아트’가 바로 산스크리트어 ‘르타’ 아베스타어 ‘아샤’와 같은 어근에서 출발한 것이다.

‘데흐’
요가의 궁극적인 목적인 ‘사마디’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디’이다. ‘디’는 아주 오래된 인도-유럽어 어근 ‘데흐(*dʰeh₁)’에서 파생했다. ‘데흐’라는 어근은 위에서 언급한 ‘하르’와 유사하나 다르다. ‘하르’가 조합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데흐’는 ‘적절한 요소를 적소에 두는 배열’을 중요시한다. ‘데흐’라는 개념을 우주창조에 적용시키면, 천체는 있어야 할 장소에 있다. 태양과 달, 지구는 인간이 기억할 수 없는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그 장소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자전하고 공전한다. 지구 안에 존재하는 무생물과 생물들도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운명 안에서 생존할 뿐이다. 사시사철, 조석간만, 인간의 희로애락이 거대한 배열 안에서 한 치도 어김없이 반복된다. 인도-유럽인들은 이것을 ‘데흐’라고 말했다. ‘데흐’라는 어근이 고대 그리스로 들어가 ‘신(神)’을 의미하는 ‘세오스(theos)’가 됐다. 신은 천체를 적소에 배치하는 존재이며, 그 안에 존재하는 만물을 위해 정해진 시간을 배열한 자다. ‘세오스’는 이런 배치와 배열을 ‘결정적인 시간’과 ‘결정적인 장소’를 통해 완수한다. ‘결정적인 시간’과 ‘결정적인 장소’를 고대 그리스어로 ‘카이로스(kairos)’라고 부른다.

삼매
‘디’는 요가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인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허물어져 하나가 되고, 주체가 스스로에게 동일하면서도 다른 객체를 만들어, 그 주체와 자신안의 객체가 신비한 합일을 이루는 경지를 의미한다. ‘사마디’는 내가 너와 하나가 되고 내가 내 앞에 보이지 않는 그것과 일치하는 경지다. ‘사마디’란 단어가 중국어로 번역되면서 그 음가를 빌려 ‘삼매(三昧)’가 됐고, ‘삼매’라는 한자어가 한국에 들어와, 우리도 ‘삼매’ 혹은 ‘삼매경’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삼매경은 요가 수행자가 발견해야 할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 경내로 진입하는 훈련이다. 2세기 로마 지리학자 클라디우스 프톨레미는 당시 로마와 지중해 전역을 지도에 담는다. 그는 이 지도에 ‘알려지지 않은 땅’이란 의미를 지닌 ‘테라 이코니타(terra incognita)’라는 용어를 사용해 그 누구도 가본 적이 없고 가보았다는 기록도 존재하지 않지만,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지역을 표시했다. 그 곳은 마치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할지라고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우주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고백과 연결된다. 우주가 무한하다면, 우리가 확인한 우주의 행성들은 우주의 극히 일부일 수밖에 없다. 요가수련자는 우주와 같이 광활한 자신의 마음에서 자신이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알려지지 않은 땅’으로 들어간다.

삼매경은 특별한 마음의 장소다. 불교 사찰이나 이슬람 사원은 외부의 공간과는 구별된 장소에 있다. 이것이 ‘경내(境內)’다. 경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몸을 정결하게 씻고 경내에 어울리는 의상을 입고, 신발을 벗어야 한다. 신발은 ‘경외(境外)’의 상징이며 요가를 수련한 적이 없는 자연 상태의 오래된 자아다. 경내와 경외를 구별하는 문지방은 오랫동안 자신을 수련한 자들만이 건너갈 수 없는 표식이다. 삼매경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자신을 흠모하는 자신으로 만들어주고, 온전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거룩한 장소다. 요가는 모든 인간의 마음 속 깊이 존재하는 거룩한 경내로 진입하기 위한 훈련이다.

삼매경은 오랫동안 수련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것은 마치 궁수의 수련과 같다. 궁술을 처음 배우는 사람은 커다란 과녁을 조준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궁수의 실력이 쌓이며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궁수와 과녁 간 거리가 멀어지고, 과녁이 점점 더 작아진다. 오랜 수련을 거쳐 올림픽대회에 나갈 정도의 실력을 얻은 궁수는 25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과녁을 세밀하게 볼 수 있는 시력을 지니게 된다. 궁술 훈련 전에는 볼 수 없는 과녁의 가운데를 훈련을 통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인식한다. 요가는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볼 수 없었던 장소로 진입하는 훈련이다.

파탄잘리는 인간의 마음속에 수시로 일어나는 잡념들을 잠재우는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한 후, 모든 생각들이 고요한 상태로 진입한 상태인 삼매경의 두 층위를 소개한다. 이것이 요가의 마지막 목표지점이다. 인식의 대상에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인 ‘삼프라즈냐타 삼마디(samprajnata samadhi)’와 인식의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간의 앎인 ‘아삼프라즈냐타 삼마디(asamprajnata samadhi)’이 그것이다. 후자의 용어엔 부정을 의미하는 접두사 ‘아’가 붙여졌다. ‘요가수트라’ I.17은 바로 첫 번째 삼매경으로 일상에서 인식의 대상에 있을 때, 그 대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기술했고, ‘요가수트라’ I.18은 인식의 대상이 없을 때, 어떻게 삼매경으로 진입하는가를 기술했다. 내가 발견해야 할 ‘알려지지 않는 경내’는 어디인가? 내가 그 경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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