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㉓] 미소공위는? 한반도 무대로 벌어진 美·蘇간의 외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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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4-26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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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蘇共同委員會, 1946.3~1947.7) 임정수립 원조위해 설치… 미군정 좌익 척결로 최종 결렬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 미국대표단과 여운형(오른쪽). 사진=경기도박물관 제공]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할 목적으로 미소 점령군사령관 사이에 설치된 기관으로, 1년4개월 동안 열렸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3월 서울에서 개최되었으며, 소련이 한국 내 협의대상자의 선정기준으로 3상회의 결정 지지(신탁통치 찬성)를 요구하는 바람에, 5월부터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그 직후 이승만은 정읍에서 단정 주장 발언을 하게 되며, 여운형과 김규식 등 중도파는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 및 토지개혁 등의 이슈를 놓고 사생결단으로 맞붙은 좌우익의 틈바구니에서, 합작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47년 5월 21일, 위원회 활동이 재개되었고, 이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라 한다. 이번에는 한민당과 반탁운동을 주도하던 백범의 한국독립당 일부도 참가했다. 하지만, 위원회는 소련이 ‘3상회의 결정’을 고집하고, 미군정이 남한 내 좌익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면서 활동이 중단되어 최종적으로 결렬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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