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㉓] "單政, 전쟁으로 이어질것" 백범과 우사, 죽음 무릎쓰고 38선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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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4-24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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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구와 김규식 등 중도파, 통일정부 수립 위해 방북 북측과 정치협상 (1948년 4월 남북협상)

 

[1948년 4월, 38선에서 방북직전 김구 일행.왼쪽 선우진 오른쪽 김구 아들 김신. 사진=위키백과]

미소공위가 결렬된 후,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국제연합으로 이관시켰고, 1948년 1월 국제연합이 가결한 통일선거 방안을 소련과 북한이 거부함으로써 단정으로 가는 수순이 확실해졌다. 일찌감치 단정 수립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 이승만(그가 단정을 최초로 입에 올린 것은 1946년 6월의 일이다)과 한민당은 남한 단독선거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백범의 한국독립당계와 우사 김규식을 비롯한 중도파들은 “단정은 곧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반대했다. 2월, 우사의 주재로 열린 중도파들의 합동회의는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 개최를 요망하는 서한을 보내기로 하고, 백범의 승낙을 얻어 백범과 우사 2인의 연서로 서울의 소련군 대표부에 전달을 의뢰했다.
국제연합 임시한국위원단의 인도대표 메논 등은 이 제안에 의미를 부여하고 북한 측 회답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회답을 받지 못했고, 26일 국제연합 소총회는 미국대표의 제안에 따라 “총선거는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만 추진한다”는 메논의 방안을 통과시켰다. 이것으로 분단은 사실상 확정되었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이를 환영했고(한민당은 축하국민대회까지 열기로 했다), 이에 맞서 백범은 “한국을 분할하는 남한단독정부도, 북한인민공화국도 반대한다”면서, 통일을 위해 최후까지 노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백범과 우사의 서신에 회답을 주지 않았던 북한은,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백범과 우사는 북측의 제안에 단정의 책임을 남측에 떠넘기려는 정치적 목적이 깔려 있음을 인식했으나, 전쟁을 막겠다는 일념 하나로 평양행을 결심했다.
실제로 백범은 평양행을 앞두고 한국독립당 대표 환송연에서 “이번 북조선에 갓다오면 내뵐 것이 무엇이 잇을건가. 나는 공수래공수거가 아닌가? 나로서 의구심이 업지도 안타”라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1948년 4월 22일 ‘남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서 축사하는 백범 김구. 사진=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백범이 먼저 출발한 뒤, 회담 참가에 미온적이던 우사는 △여하한 형태의 독재정치도 배격 △전국적 총선거를 통한 통일중앙정부 수립 △여하한 외국에도 군사기지 제공 거부 등의 5개 항을 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북측에 제시했고, 자신의 특사가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나 수락 의사를 확인하자, 38선을 넘었다.
백범과 우사는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이른바 ‘4김회담’을 두 차례 갖고(26일, 30일), 남북지도자협의회는 △외국군대 즉시 철거 △내전 불가 △통일적 민주정부 수립 △남조선 단독선거 결과 불인정 등의 내용을 담은 4개 항의 결정서를 채택했다.
그러나 백범과 우사가 귀국해 이 내용을 국민에게 알린 며칠 뒤, 북측은 전력송전을 중단하는 등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다. 결국 5월 10일 남한 단독총선거는 예정대로 치러졌고, 해방 후 정국에서 분단에 반대하던 중도파들은 설 땅을 잃었다. 남북협상은 7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우파로부터 공격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통일정부를 향한 이들의 충정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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