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⑱] "우리손으로 해방을" 참전국 지위 얻으려 '진군나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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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4-17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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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평양 전쟁 발발… 끝내 망명정부 승인 못받고 연합국 명단서 제외

[1941년 12월 7일, 일제의 진주만 습격 모습. 아주경제DB]


전선은 날로 확대됐다. 나치 독일이 소비에트 러시아를 공격한 게 1941년 6월. 일본군은 기다렸다는 듯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밀고 들어갔다. 그러자,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영국 수상 처칠은 나치와 파시스트, 군국주의에 맞서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대서양헌장을 발표했다(1940.8). 이로써 미국의 참전이 확실해졌다.
나치는 러시아, 일제는 중국이라는 수렁에 빠졌다. 그 이면에는 원료와 시장을 자급하지 못하는 두 나라의 딜레마가 존재했다. 일본이 더했다. 독일은 자국 내 루르의 철광지대와 루마니아의 플로에스티유전에서 전략물자를 부족하나마 확보할 수 있었으나, 일본은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미국은 인도네시아의 유전을 지배하던 네덜란드와 함께 일본의 목줄을 조였다. 8월, 미국은 휘발유와 고철의 대일 금수 조치를 단행했다. 대륙 철군이냐, 남방 진군이냐. 운명의 갈림길에서, 일제는 미국과 전쟁을 선택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해군 함재기들이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을 기습했다. 태평양전쟁. 그것은 일제가 스스로 판 최후의 무덤이었다.

 

[백범이 미주 교포사회에 보낸 태극기.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중국정부에게 망명정부 승인 요청
대서양헌장이 나오자, 임시정부는 즉각 지지성명을 냈다. 이어서 10월에는, 중국정부에게 임정을 대한민국 망명정부로 정식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는 새삼스러운 게 전혀 아니었다. 상해 시절부터 노력해 왔던 바, 승인 요청은 해묵은 숙제이기도 했거니와, 시기적으로 볼 때 적절한 것이기도 했다.
국제정세가 한국 독립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1년 가을, 추축국의 위세는 대단했다. 거의 무한정의 인적․물적 자원을 보유한 미국이 참전하면 전세가 뒤집히리라는 예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해도, 그건 그때 이야기고, 당장의 출혈이 워낙 막심했다.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소련군 병사만 1백만이 넘었고, 중국군의 손실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9월,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 전국위원회가 런던에서 창설됐다. 영국은 프랑스와 폴란드의 망명정부를 승인하고, 미국의 물자지원을 바탕으로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러한 사정이 임시정부를 고무시켰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프랑스와 폴란드 망명정부는 그들의 주중대사를 통해 임정을 승인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일제가 패망하지 않는 한, 중국은 한민족과 한 배에 탄 거나 다름없었다. 자국민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한국 독립운동세력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끝내 중국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우리 문제였다. 수당이 그의 회고록에서 통탄했듯이, 망명지에서조차 단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게 너무나 뼈아팠다.
설상가상, 중일전쟁이 터진 후 피난길에 오르면서, 임정은 국내와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일제의 수탈과 억압은 극에 달했고,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가증스런 구호 아래 성씨와 이름마저 바꿀 것을 강요했다.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가 된 이광수. 그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천황 폐하께서 즉위하신 산의 이름에서 성씨를 땄다’는 내용의 ‘선씨고심담(選氏苦心談)’을 실었다. 소위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짓거리가 이랬다.

[미주 동포들의 광복군 창설 축하 기념식 로스앤젤레스 1940.10.20)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연합국 명단에 빠진 임시정부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던 국공합작. 곳곳에서 불협화음을 내며, 정부군과 홍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관할구역 다툼. 유격전의 속성상 정부군이 후퇴한 지역에서 일본군 후방을 노리는 홍군으로서는, 작전구역을 벗어나지 말라는 중국정부의 경고를 따를 수가 없었다. 결국 불상사가 터지고 말았다.
안후이성에서 일본군을 쫓던 신사군이 정부군 요구로 물러나다가, 불의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환남사변(晥南事變, 1941.1)이다. 외적과 싸우는 마당에 동족에게 총질을 해댔으니, 연합국의 지탄이 정부군에 쏟아졌다. 하기는, 우리의 경우 서로 협조는 못할지언정 그들처럼 서로 해치는 일은 삼갔으니, 다행이라고 할까.
그러나 분열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고, 그럴수록 항일전선은 왜소해졌다. 어느 쪽 책임이 큰지는 역사만이 알 일이나, 임정이 해외 독립운동세력 전체를 포용하지 못했던 것은 안타깝지만 사실이었다. 1942년 1월 1일, 워싱턴에서 연합국 26개국 공동선언이 발표됐다. 여기에는 프랑스, 폴란드, 네덜란드 등 망명정부들도 이름을 올렸다. 임시정부는 참여하지 못했다.
중국정부의 승인을 얻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참전국 지위 획득은 해방을 우리 손으로 쟁취할 필수조건이다. 당시 중국이 연합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해방 직전, 충칭에서 활동하던 정파들이 통합에 합의했다. 이미 일제의 패망이 코앞에 다가온 상황. 너무 늦었다.
 

[해외한족대회 대표들과 대한인부인구제회 회원들. 하와이 호놀룰루 1941.5.1 앞줄 오른쪽 세번째가 김호 회장.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1941년 12월 10일 발표한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선전포고
진주만 기습 사흘 뒤인 19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는 드디어 일본에 대해 개전을 선포했다. 선전포고. 그것은 임시정부가 겨레를 대표해 독립전쟁에 나선다는 국제적 선언이자 참전국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었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해, 김호(金乎)가 회장으로 있는 재미한족연합회는 캘리포니아 거주 동포들의 지원금을 모금해, 광복군 군자금 조달에 동참할 뜻을 전달했다.
중국정부는 정식 승인은 여전히 미뤘으나, 12월말부터 공식적으로 재정 및 물자 지원을 개시했다. 대신, 임시정부는 광복군 행동준승을 받아들여야 했다. 광복군 초모공작은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조선의용대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그쪽은 병력이 백명이 넘는다. 최전선으로 이동하자면, 정부군과 홍군의 허가를 함께 받아야 했다.
저우언라이가 충칭에 있었다. 광복진선과 민족전선 양쪽에 늘 단결해서 항일투쟁을 하라고 조언하던 그는, 선뜻 통과증을 발행해주었다. 이 통과증을 갖고 조선의용대는 석정(石正) 윤세주(尹世胄)의 지휘 아래 산시성으로 들어가, 화북지대(華北支隊)라는 이름으로 팔로군 작전구역에서 일본군과 싸우게 된다.
그런데 충칭에 남았던 조선의용대 본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자(1942.5),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고 광복군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사령관은 팔로군에 몸을 담고 있던 무정(金武亭). 그는 상해 시절 성엄과 함께 합숙하며 우의를 다진 사이였음에도, 임시정부는 그쪽과 손을 잡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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