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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이광효 기자입력 : 2018-04-16 18:13수정 : 2018-04-16 18:13
차일혁, 38년의 길지 않았던 삶과 위대한 꿈을 향한 여정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의 생애는 매우 짧고도 길었다. 인간이 타고난 최소한의 수명 60세를 채우지 못한 점에서는 그가 살다간 38세의 삶은 매우 짧았다.

그러나 차일혁은 그 짧은 생애동안 몇 사람의 몫을 거뜬히 해놓고 갔다. 그리고 대한민국 현대사에 커다란 역사의 발자취를 남기고 갔다. 차일혁의 삶은 외형적으로 볼 때 크게 6개 부류로 압축해 볼 수 있다. 일제하 한민족으로서 의식과 양식을 지닌 열혈(熱血) 청년, 중국에서의 항일독립운동가, 광복 후 일본의 악질형사를 처단한 민족의 투사, 건국과 건군을 위한 애국지사, 북한 남침 후 활동한 유격대장과 빨치산토벌대장, 휴전 후 맡았던 민주경찰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보면 차일혁은 한 사람으로서 여섯 사람의 몫을 넉넉히 살고 간 셈이다.

그 과정에서 차일혁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차일혁 자신도 그런 삶을 다시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고 어려웠던 ‘고단한 삶의 여정’이었다. 하지만 차일혁은 그런 모든 것을 이겨내고 단순히 ‘대한민국 경찰의 영웅’을 넘어 ‘민족의 영웅’ 나아가 ‘대한민국의 영웅’으로 굳건히 자리 잡게 됐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이미 차일혁은 국가로부터 ‘6·25전쟁의 영웅’과 ‘호국의 인물’로 선정됐고, 언론에서 선정한 ‘대한민국을 수호한 18인’ 중 경찰로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역사적 인물이 됐다. 대한민국을 수호한 18인의 인물들로는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맥아더 원수를 비롯한 유엔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을 비롯한 미8군사령관, 그리고 백선엽 대장을 비롯한 육해공군 참모총장들로 이뤄졌다. 여기에 경찰로서는 유일하게 차일혁이 포함되어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차일혁이 그런 칭호를 받게 된 데에는 그의 뜨거운 애국심과 뛰어난 전투지휘능력을 통해 이뤄진 수많은 전공(戰功)들이 있다. 차일혁은 6·25전쟁을 통해 수없이 많은 무공훈장과 표창장 그리고 감사장을 받았다. 경찰역사상 가장 많은 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이 바로 차일혁 경무관이다. 거기다 전란 통에 싸우기도 바쁜데 천년고찰(千年古刹)을 지켜가며 싸운 공로로 문화예술인도 감히 받기 힘든 문화훈장까지 받았다.

그리고 상금으로 받은 돈은 전란으로 어렵게 된 이재민들을 위해 기부를 하였다. 모든 것이 귀감이 될 만한 일들이었다. 차일혁은 그런 일을 드러내놓지 않고 은밀히 했다. 하지만 그런 선행은 시간이 다소 걸릴 뿐, 주민들에 의해 머지않아 밝혀졌다.

이러한 것들이 차일혁이 추구하는 삶의 지표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것은 일부분이었다. 차일혁을 아는 데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차일혁은 겉으로는 차돌같이 단단하면서 속은 그 무엇보다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것은 의지가 강하면서 인정이 많다는 것을 뜻했다. 차일혁은 일생을 살면서 남에게 피해주는 것을 싫어했다. 차라리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특히 차일혁은 힘든 삶의 여정 속에서도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았다. 전투 중에 적이 쏘는 총알을 세는 배짱과 여유, 유엔군 참전을 보고 부처님의 미소를 배우기 위해 왔다고 말하는 재치 있는 유머는 차일혁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또 죽은 빨치산 시체를 왜 묻어주느냐고 하자, 그럼 죽어서도 그들이 공산주의자냐고 오히려 반문하는 차일혁의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차일혁에게 매료됐다.

그리고 차일혁은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에게 닥칠 피해를 뻔히 알면서도 스스로 과감히 행동으로 옮긴 그의 이타심(利他心)과 관심 및 배려는 다른 사람이 감히 흉내 내기조차 버거운 것들이었다. 빨치산토벌대장인 자신의 집에 부역자들을 숨겨주고 식사를 대접하는 일, 빨치산총수의 장례를 직접 주관하고 스님을 불러 정중히 치러주는 일, 빨치산 총수의 아이를 임신한 산중(山中) 여인을 부대 내에서 출산하게 하는 일, 전투 중에 사살된 빨치산 시체를 매장해 주는 일, 부하의 잘못을 덮기 위해 과감히 사표를 던지는 일 등은 일반 범인(凡人)이 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들이었다.

하지만 차일혁은 그런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해냈다. 차일혁이 경찰서장을 할 때는 아침 출근 전에 반드시 거울을 보면서 “나는 오늘도 자장면을 공짜로 얻어먹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나갔다. 그럴 정도로 차일혁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 힘없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스스로 경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얼마나 소탈하면서도 멋진 모습인가! 여기에는 차일혁의 철저한 자기관리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보니 차일혁의 길지 않은 38년의 삶의 여정은 평탄하지 않으면서 숨 가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정도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차일혁에게 평범한 날은 없었다. 이는 마치 그의 많은 이름이 말해주고 있었다. 차일혁은 어릴 때부터 유난히 많은 이름을 갖고 있었다. 어릴 적에 차일혁은 차갑수(車甲洙), 차문남(車文南), 차용철(車鏞徹)이라는 이름을 썼다.

이들 이름에는 차일혁의 아픈 가족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후 차일혁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김철(金喆)이라는 이름을 새로 썼고, 해방 후에는 사회혁명에 도움을 주는 이로운 사람이 된다는 의미로 차리혁(車利革)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리고 고향인 전주로 내려와서는 최종적으로 차일혁(車一赫)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 이름에서 차일혁이 지내 온 삶의 여정을 알 수 있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갑수란 이름은 아버지 차유선의 호적에 실린 이름이다. 차유선은 보천교 차경석의 집사였다고 한다. 보천교 연구자 안후상에 의하면 차일혁이 동학 및 보천교 집안과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이란 설이 차일혁이 살아있을 때 정읍에서 있었다고 한다. 차문남은 정읍 본가에서 연안 차씨 문절공파의 ‘0남(南)’자의 항렬을 따라 쓴 이름이고, 차용철은 문남이란 이름을 쓰지 못하게 되자 대신 썼던 이름이다. 이들 이름에는 차일혁이 짊어졌던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차일혁은 어렸을 때 법관이 되는 것을 소망했다. 차일혁은 이를 위해 노력도 했다. 최초 김제군 금산면 성계리에 있는 원평보통학교(현 원평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집안 사정으로 어머니 고향인 충남 홍성군 홍동보통학교(현 홍동초등학교)로 전학해 그곳에서 졸업했다. 총기(聰氣)가 넘쳤던 차일혁은 공부도 잘했다. 그래서 상급학교로 진학했다. 전북의 명문학교인 고창고등보통학교(통칭 고창고보)였다. 전북일보 김만석 기자와 빨치산총수 이현상이 다닌 적이 있던 학교였다. 그런 점에서 세 사람은 고창고보 동문인 셈이다.

하지만 차일혁은 고창고보를 졸업하지 못하고 집안사정으로 다시 홍성공업전수학교로 전학가게 됐다. 차일혁은 이 학교를 다니던 중 인생의 대변화기를 맞게 된다. 하루는 차일혁이 수업을 받던 중 평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발언을 자주 한 한국인 교사를 일본 순사가 강압적으로 체포하려는 것을 보고, 차일혁이 의분을 참지 못하고 달려들어 일본 순사를 두들겨 패줬다. 이로 인해 차일혁은 일제경찰에 쫓기게 되면서 결국에는 중국으로 가게 되고, 그때부터 항일독립군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차일혁이 어릴 적 꿈꾸었던 법관의 꿈도 날아갔다.
차일혁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재능은 뛰어났다.

고창고보 시절부터 차일혁은 무술을 배웠고, 학비를 벌기위해 풍각장이 집에서 잡일을 해주며 북과 장구를 치며 민요(民謠) 부르는 법을 배웠다. 차일혁이 민족문화와 예술에 눈을 뜨게 된 계기였다. 또 이때 단련한 무술과 강인한 체력은 차일혁으로 하여금 독립운동과 빨치산토벌대장으로서 맹활약을 하는데 육체적으로 크게 도움을 줬다. 불심(佛心)이 많은 것은 차일혁 집안의 내력이었다. 차일혁의 어머니는 불심이 깊었다. 그래서 차일혁도 절과 부처님에 대해서는 외경심(畏敬心)을 갖고 대했다. 차일혁이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 속에서 염주를 굴리며 사찰을 보호하려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차일혁은 그렇게 38년의 생을 살면서 사나이로서 베풀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떠났다. 이는 마치 태어날 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 수행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보니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다만 있다면 어린 아들 차길진(車吉辰)이 마음에 걸렸을 뿐이다. 너무 어린 나이에 두고 가는 것이 다소 눈에 밟혔다. 그래서 어린 아들에게 인생을 살며 후회스러운 일이 없도록 ‘유훈(遺訓) 아닌 유훈 3가지’를 평소에 입버릇처럼 말하며 교육했다. “결혼하지 마라, 약속을 지켜라, 정치에 발을 담그지 마라!”가 바로 그거였다.

차일혁 자신이 살아 본 인생에서 깨달은 인생철학이었다. 그것을 사랑하는 아들에게 들려줬다. 그리고 홀연히 떠났다. 아들 길진은 선친의 유훈을 가슴 깊이 새겨두고 실천했으나, 한 가지만 지키지 못했다. 결혼이었다. 하지만 선친이 염려했던 결혼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차일혁에게는 오랜 꿈이 있었다. 가족이, 민족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차일혁이 아나키스트로 활동했던 것도 그런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적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소박한 꿈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게 닥친 조국의 현실은 냉혹했다. 일제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난 그에게 법관의 꿈은 일찍 날아갔고, 더군다나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은 더욱 이루기 어려운 일이 됐다.

그래서 차일혁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해방 후 분단된 현실 앞에서는 통일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북한 남침 후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던 시절에는 이 땅의 많은 국민들에게 다소나마 전쟁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 그들에게 보다 편안한 복락(福樂)의 삶을 되찾아주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꿈을 이루기에는 조국의 현실은 암담했고, 그에게 닥친 장애물은 너무나 컸다. 전쟁으로 더욱 고착된 남북 분단의 현실 앞에 차일혁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한때 자신이 행했던 빨치산 총수에 대한 장례와 그 여인에 대한 ‘인간적 배려’ 그리고 빨치산에서 전향한 빨치산 부하들을 챙기는 것을 두고 모략과 음해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차일혁은 가족과 부하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남에게 빚을 지는 것을 유달리 싫어했던 차일혁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스스로 빚을 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죽음뿐이었다. 차일혁은 그렇게 해서 죽음을 선택했다. 만인(萬人)을 이롭게 하는 ‘의로운 죽음’이었다.

그렇지만 차일혁은 자신의 소망이자 민족의 염원인 통일에 대한 꿈만큼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차일혁은 생각을 같이한 동지들에게 통일에 대한 유업(遺業)을 남겨놓고 갔다. 이는 북한문제연구소 소장을 지낸 김창순이 차일혁 사후(死後)에 유가족을 찾아와 알려줬다. 김창순은 “선생님이 남기신 통일유업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요지의 메모와 발언을 남겼다. 그것을 보면 차일혁의 꿈은 확실히 통일이었고, 이를 위해 모종의 노력을 하다가 숨을 거뒀던 것 같다.

김창순은 차일혁의 수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차일혁이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제2연대장 시절 반공포로로 편성된 618부대장이던 김명주이다. 명석한 두뇌로 한학(漢學)과 공산주의 이론에 밝았던 김창순은 차일혁에 의해 내무부 관련 연구소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국내최고의 북한전문가로 부상한 인물이다. 그리고 다년간 북한문제연구소장으로 활동했다. 그런 김창순이 뒤늦게 차일혁의 유업이자 꿈을 가족과 사회에 밝혔다.

그렇게 볼 때 차일혁은 비록 38세라는 나이에 세상을 등졌지만, 그의 삶은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니었다. 차일혁이 세상을 떠날 때는 자신이 이승에서 해야 할 될 일을 다 마쳤다고 여겼다. 살아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홀연히 떠날 수 있었다. 차일혁은 김만석 기자가 표현한 것처럼 “마치 혜성처럼 왔다가 샛별처럼 갔다.” 38년이라는 찰나의 삶을 차일혁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살다갔다. 촘촘하고 짜임새 있게 잘 짜여 진 비단 명주처럼 알차게 살다갔다. 할 일을 다 하고 간 차일혁에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그를 보호해주지 못한 대한민국이 오히려 빚을 진 셈이다.

차일혁이 꿈꾸었던 통일은 이제 우리 후세들이 할 일이다. 차일혁은 살아서 입버릇처럼 말했다. 남북통일이 되면 드넓은 만주평야를 여행하고 싶다고 했다. 차일혁의 꿈이 하루빨리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만주벌판을 향해 달리는 차일혁을 보고 싶다. 그날이 바로 대한민국 영웅인 차일혁이 진정으로 극락왕생(極樂往生)하는 날이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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