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⑰] 대한민국의 첫 군대, 조국독립전쟁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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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4-16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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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33년만에 광복군 창설

[광복군 성립전례 후 한중대표 기념촬영.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원년(1919년. 임시정부 수립연도),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 원수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함을 이에 선언한다.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가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를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과거 30여 년간 일본이 우리 조국을 병합 통치하는 동안 우리 민족의 확고한 독립정신은 불명예스러운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자비한 압박자에 대한 영웅적 항쟁을 계속하여 왔다. 영광스러운 중화민국의 항전이 4개년에 도달한 이래(1937년 중일전쟁 발발), 우리는 큰 희망을 갖고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할 시기가 왔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중화민국 최고 영수 장개석 원수의 한국 민족에 대한 원대한 정책을 채택함을 기뻐하며, 감사의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우리 국가의 해방운동과 특히 우리들의 압박자 왜적(倭敵)에 대한 무장 항전의 준비는 그의 도의적 지원으로 크게 고무되는 바이다. 우리들은 한중 연합전선에서 우리 자신의 계속 부단한 투쟁을 감행하여 극동 및 아세아 인민 중에서 자유, 평등을 쟁취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한국광복군 선언문>, 1940.9.17.)
 

[(사진 왼쪽) 1940년 9월17일 광복군 성립전례에서 선언문을 낭독하는 백범과 김학규. (사진 오른쪽) 광복군기를 들고 있는 총사령관 이청천.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임시정부 자력으로 진행한 총사령부 창설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의 거사 직후부터 백범에 존경과 신뢰를 표시해왔던 만큼, 광복군 창설에도 호의적이었다. 그런데 실무를 맡은 그의 막료들은 광복군이 자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야 하고, 작전지역 군사령관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광복군 총사령부에 중국 장교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시정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이 때문에 광복군 편성이 지연됐다. 임시정부 직속 광복군창설위원회는 중국 측의 인준 없이 실무를 밀어붙였다. 군자금 역시 자체적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구상 당시에는 중국정부의 지원을 얻기로 한 게 사실이었으나, 참전국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한시가 급했다. 재미동포들의 모금에 기대를 걸었고, 실제로 총사령부 창립까지는 자력으로 진행했다.
1940년 9월 17일, 드디어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충칭 시내 자링빈관(嘉陵賓館)에서 거행된 총사령부 성립전례(成立典禮)에는, 류치(劉峙) 충칭 위수사령관이 중국군을 대표해 장제스의 치경문(致敬文, 축사)을 낭독했다. 군사위원회 측은 내심 불쾌했을 것이나, 예의를 지켰다. 국공합작기구인 국민참정회의에서는 국민당의 우톄청(吳鐵城)과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참석했다.
광복군 총사령관에는 이청천, 참모장에는 이범석이 임명되었다. 수당의 아들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의 기억에 따르면, 백범이 애초에 참모장으로 점찍었던 인물은 김홍일이었으나, 청산리대첩을 필두로 한 만주 독립군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이범석을 추천한 백산의 뜻을 받아들였다고 한다(김자동,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푸른역사, 2014 참조).
 

[광복군 성립전례 내빈 방명록. 위에서 두번째 열, 오른쪽에서 세번째에 저우언라이의 서명이 보인다.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광복군의 첫 임무는 병력 모집
군대에는 통수체제가 필수다. 광복군은 외인부대나 떠돌이군대가 아닌 독립전쟁의 간성(干城).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임시통수부관제를 제정․시행하고(1940.11.1), 주석에 백범, 참모총장 류동열, 군무부장 조성환, 내무부장 조완구를 선임했다. 이렇게 통수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광복군은 임시정부 직할로서 대한민국 최초의 군대가 되었다.
총사령부는 두 달 뒤 시안으로 이전했고, 이어서 3개 지대가 편성됐다. 이 3개 지대에 적전(敵前)에서 병력 모집을 위한 초모작전이 기본임무로 하달되었으며, 이듬해 1월에는 이미 시안에 파견되어 있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제5지대로 편제됐다. 제1지대장에 이준식(李俊植), 제2지대장에 김학규(金學奎), 제3지대장에 공진원(公震遠), 제5지대장에 나월환(羅月煥)이 임명되었다. 광복군 병력은 2월경부터 전선으로 진출했다.
총사령관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은 중국정부와 교섭을 맡아야 했으므로 시안에 갈 수 없는 형편이라 전선에서는 몽호(夢乎) 황학수(黃學秀)가 총사령관, 김학규가 참모장 대리를 각각 맡았다. 성엄 역시 총사령부를 보좌하느라 충칭에 남았다. 그는 광복군 정훈처 선전과 주임으로 기관지 <광복군> 편집을 주관하는 동시에, 한국독립당 조직부 주임으로 당무까지 도맡아 충칭에서 생활했다. 수당은 기꺼웠다. 남편이 바쁘다는 건 해방이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광복군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병력 모집이었다. 이에 따라, 제5지대와는 별도로 세 개의 징모분처(徵募分處)를 설치해 산시성(山西省), 쑤이위안성(綏遠省), 저장성(浙江省), 안후이성(安徽省) 등으로 공작대원들을 파견했다. 대원들은 일본군 점령지역에 잠입해 현지 한인 청년들을 광복군으로 끌어들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광복군은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3백명이 넘는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 머나먼 독립전쟁의 길
광복군을 창설할 때만 해도, 임시정부는 단기간 안에 적어도 사단급 병력(1만5천명 안팎)은 규합하리라 낙관했다. 만주사변 이후, 만주 독립군 출신 항일 지도자들 대다수가 만리장성 남쪽으로 내려왔지만, 그래도 남은 병력이 꽤 될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한편, 일본군이 장악한 연해지역 도시들에는 상당수의 한인들이 살게 되었다. 이들 또한 광복군의 초모대상이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만주지역의 독립군은 3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일본군의 토벌작전에 밀려 사실상 괴멸된 상태였다. 중국공산당과 연대에 힘입어 조직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임정과는 이념적으로도 거리가 있었거니와, 광복군이 창설된 1940년 시점에는 창바이산(長白山, 백두산) 일대에서 명맥을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무엇보다 만주로 들어가는 루트가 막혀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 점령지역에 새로 이주한 동포들 대부분은 민족의식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일본군에 한국인 출신 지원병이 있다지만, 이들에게 민족의식이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광복군은 극심한 인적 자원 부족에 시달렸고, 이는 약산이 이끄는 조선의용대라고 다르지 않았다.
병력, 무기, 군비.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게 없었다. 중국정부는 효과적인 지원 및 군사작전의 통일성을 이유로, 이른바 광복군 행동준승(行動準繩)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쉽게 말해, 작전지휘권을 넘기라는 것이었다. 세상 어느 나라 군대가 이처럼 혹독한 시련을 헤치고 나가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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