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침착(沈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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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04-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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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가 수트라 I.15

[사진=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


경전
종교와 문명을 요약한 얼개가 있다. 그것을 종교에서는 ‘경전(經典)’이라고 부르고 문명에서는 ‘고전(古典)’이라고 부른다. 경전은 종교의 핵심사상을 기록한 책으로 처음에는 개별 종교의 창시자나 사상가 입을 통해 말한다. 이 내용, 즉 ‘구전(口傳)’을 통해 회자되던 어록을 일정한 시기를 지나 글로, 즉 ‘문전(文傳)’으로 남긴다. 이것이 경전이다. 그 종교 구성원들은 ‘문전’에 담긴 내용을 해석해 자신들의 삶의 지표로 설정하기에 가치가 있는지, 무엇이 전통적으로 권위가 있는 문장이나 내용인지 열띤 논쟁을 벌인다. 이 논쟁과정이 ‘해석(解釋)’이다. 경전을 확립하고 그 안에서 형성된 일관된 사상과 교리는 한 종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유대인들은 이런 책을 히브리어로 ‘토라(Torah)’라고 불렀다. ‘토라’는 흔히 자신들의 경전인 히브리 성서의 첫 다섯 권들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를 지칭하는 용어이자, 히브리 성서 전체를 이르기도 한다. ‘토라’는 히브리어 동사 ‘야라’의 명사형으로, 그 원래 의미는 ‘활이 과녁에 명중하다’이다. 유대인들은 각자 자신들의 삶에 자신들이 따라야 할 유일한 길이 있으며, 그 길을 따라가는 이정표가 경전에 기록되었다고 믿었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운명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하다. 위안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글들과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을 훈련시키는 금언들이 필요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경전’을 ‘카논(canon)’이라 불렀다. 그들은 고대 히브리어에서 물건의 길이를 재는 ‘자’를 의미하는 단어인 ‘카네(qaneh)’를 빌려, ‘만물의 기준을 정하는 책’이란 의미로 ‘카논’이란 그리스어를 만들었다. ‘카논’이란 그리스 단어는 후에 영어에서 널리 전파되어 ‘경전’ 혹은 ‘정전’을 의미하는 ‘캐넌(canon)’이 됐다.

고대 인도인들은 오래전부터 ‘경전’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넓적한 나뭇잎들을 모아 건조시킨 뒤 그 위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성현들의 어록을 기록했다. 어록들이 기록된 여러 장의 나뭇잎을 실로 묶어 종교 사상 전통의 글로 구별했다. 이 경전을 고전 산스크리트어로 ‘수트라(sutra)’라고 부른다. ‘수트라’는 인도-유럽어 어근에서 ‘실로 꿰매다’라는 의미를 지닌 *sew-의 수동-분사형으로, 그 축자적인 의미는 ‘여러 나뭇잎들을 하나로 묶은 것들’이다. ‘수트라’는 불경이 기록된 팔리 산스크리트어로 ‘수타(sutta)’가 됐다.

불교가 기원후 1세기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중국인들은 ‘수타’를 ‘경전’이라고 불렀다. 이 단어에서 ‘경(經)’자는 ‘실 사(糸)’와 실이 세로로 곧게 뻗은 줄을 의미하는 ‘경(巠)’의 합성어다. 중국에서도 성인들의 어록들이 기록된 종이들을 실로 묶어 책을 만들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경전은 한번 읽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좌표를 제시하는 책이기 때문에 ‘전(典)’을 붙였다. ‘전’은 실로 묶은 종이들을 조상이나 신을 위한 제사상 위에 올려놓은 모습을 형상화했다.

공식어구
특별한 책들만 경전이 될 자격이 있다. 개별문장이 종교의 창시자나 그의 위임을 받는 직계제자의 말을 옮겼을 때, 경전으로 포함될 만한 권위가 생긴다. 이 권위를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문구가 있다. 경전이면 흔히 등장하는 관용적이지만, 권위를 보장하는 표현 ‘공식어구(公式語句)’라고 부른다. 공식어구는 문장 앞에 등장해 그 다음에 전개되는 문장이 실제로 성인이나 그의 제자가 말한 내용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유대인들은 히브리 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이 신의 음성을 직접 청취했고, 그것을 가감 없이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말하기 전에 항상 ‘야훼신이 이렇게 말했다’라고 전한다. 이 히브리어 문구가 ‘와요메르 야훼 아마르(way-yomer Yahweh amar)’다. 이 문구 다음에 등장하는 말들은 야훼신이 직접 말한 직접 인용구다. 이 문구는 그리스도교 경전에서도 그대로 사용된다. 소위 ‘예수께서 가라사대’라는 오래된 표현이 상징하는 관용구다. 복음서에서 이 문구 다음에 등장하는 문장은 예수가 직접 말한 내용이란 점을 강조한다.
 

'바가바드기타'에 등장하는 아르주나가 카우라바스와 싸우는 장면.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인도 경전 '바가바드기타'도 이런 관용구를 사용하는데 전략적이다. '바가바드기타'는 이렇게 시작한다. “산자야가 말했다(sanjaya uvaca).” 산자야는 드리타라슈트라 왕의 마부이자 전체 이야기를 소개하는 해설자다. 기원후 2세기 영지주의 문헌인 '도마복음서'는 자신이 말하는 114개의 예수의 어록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이것은 살아있는 예수가 말했고, 유다 도마(쌍둥이)가 기록한 숨겨진 어록들이다.” 동·서양 경전들은 자신들의 기록의 권위와 정통성을 강조하고자 이런 관용어구들을 사용했다.

서양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공부하는 학문체계의 기본 골격을 잡아 분류체계를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신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신적인 합일의 가능성을 제시해 불교와 그리스도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탁월함이 오히려 해가 되기도 한다. 그는 사상은 거의 완벽해 그의 주장은 반드시 옳은 것으로 수용되어 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행위는 소크라테스가 시작한 의심에 기반한 철학정신에 위배된다. 이것이 ‘권위가 보장하는 진리(truth by authority)’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부피가 같은 무거운 쇠와 나무를 일정한 위치에서 떨어뜨리면, 쇠가 먼저 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16세기 갈릴레오 길릴레이가 피사탑에서 실제 실험으로 두 물체가 동시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전까지 진리로 수용됐다. 그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틀렸다.

침착
파탄잘리는 요가의 목적인 평온을 유지하기 위한 두 가지 요소들 중 두 번째 요소인 ‘이욕’ 혹은 ‘침착(沈着)’이라고 번역된 ‘바이라그얌’을 '요가수트라' I.15에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드리슈타-아누스라비카-비사야-이트르슈나스야 바시카라-삼즈나 바이라그얌.” 이 문장을 번역하면 “침착은 그럴듯해 보이는 것들이나 남들로부터 전해 들어 경전에 기록된 것들을 갈망하는 것으로부터, 의식적으로 균형을 잡을 때, 등장한다.” 침착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자신의 감각을 제어해 자신을 위해 최선의 모습으로 전환된 마음가짐이다. 침착은 내적인 삶의 외적인 행위이자 상태다. 침착은 만물을 자연의 이치에 의해 움직이게 한다.
‘침착’이란 산스크리트어 단어 ‘바이라그얌’은 ‘라가(raga)’라는 단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라가’는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쾌락 때문에 생기는 흥분이다. 침착이란 그 쾌락(raga)으로부터 자신을 강제로 떼어내는 행위(vis)다. 요가를 수련하는 자는 어떤 대상이 아무리 매력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가져다주는 육체적인 쾌락은 일시적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심지어 그 쾌락이 반복되면, 중독을 일으켜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사실도 이해한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침착이다. 오감을 자극하는 쾌락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은닉돼 언제나 약간의 자극에도 되살아나는 ‘윤회’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이 감각의 만족으로부터 유리돼 허전을 경험한다. 인간은 요가를 통해 오감을 자극하는 감각적인 쾌락은 일시적이며 중독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한 이런 탐닉은 반드시 대가를 요구한다. 자신의 지적이거나 육체적인 만족을 위한 옳고 그른 모든 행위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윤회의 덫에 걸릴 수밖에 없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다 지친다. 그 쾌락은 일시적이며 만족감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이런 욕심에서 자신을 떨어뜨리는 침착을 수련한다. '바가바드기타' V.22도 이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각의 접촉을 통해 나오는 쾌락은 고통의 원천이다. 그것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쿤티의 아들아! 현명한 자는 그것들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파탄잘리는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쾌락을 야기하는 두 가지를 소개한다. 하나는 ‘드리슈타’ 즉 인간의 오감 중 가장 신속한 시각을 통해 전해지는 쾌락이다. 자신의 오감으로 직접 확인하여 쾌락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는 유혹이다. 핸드폰 화면에 하루 종일 속보로 등장하는 뉴스에 얼이 빠져 그것을 탐독하는 나 자신, 자극적인 문구와 그림으로 나를 유혹하는 컴퓨터 스크린이다. 핸드폰, 컴퓨터, 그리고 TV 내용은 ‘권위’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사실이자 진리라고 우리를 현혹한다. 나의 오감을 자극해 중독으로 만드는 수많은 광고들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는 방법이 바로 침착이다.

다른 하나는 ‘드리슈타’와 깊이 연관된 ‘아누스라비카’다. 그것은 ‘권위가 있는 사람들로부터(anu) 내가 전해들은 것들(스루)’이다. 파탄잘리는 당시 모든 사람들이 전해 들어 진리라고 수용한 힌두교 경전 ‘베다(Veda)’를 지칭한다. 베다는 경전으로서 오래전부터 구전으로 전승되어 들은 것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이 베다 듣기를 즐겼다. 베다는 지상에서의 비참한 반복적인 삶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한 천상의 쾌락을 간접적으로 맛보여주기 때문이다. 파탄잘리는 ‘경전’이란 이름으로 다가오는 천상의 쾌락일지라도 과감하게 탈출하여 침착을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자신들이 지상에서 선을 쌓아, 사후에 그에 해당하는 복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천상의 복을 위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못하는 사람에 대한 경고다. 파탄잘리는 정교하고 복잡한 의례와 교리로 무장한 베다의례를 공격한다. 침착은 물질적인 종교성에 관한 비판이다. 나는 일시적이며 소모적인 오감의 쾌락을 희구하거나 탐닉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전통이나 정통이란 이름으로 가장하여 유사한 진리를 팔고 있는 미디어 내용이나 사상에 속고 있지 않는가? 나는 오감뿐만 아니라 과거의 생각으로부터 나를 강제로 떼어내고 내 자신을 살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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