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칼럼] 문제는 ‘과거의 핵’, 역순(逆順)으로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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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 동신대교수(정치학)
입력 2018-04-11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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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칼럼]
 

[사진=이재호 초빙논설위원 · 동신대교수(정치학)]
 

4·27 남북 정상회담이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북·미 정상회담도 늦어도 6월초에는 열릴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한다. 남북이 핵과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된다면 더 뭘 바라겠는가. 그동안 많은 전문가들이 회담전망에 대해 여러 얘기를 했기에 중언부언은 피하고 싶다. 이젠 뭔가 담대한 발상이 필요한 때다.

요약하자면 초점은 ‘과거의 핵’에 모아져야 한다. 북이 이미 완성했다는 핵탄두를 찾아내 전량 폐기하는 작업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논의도 합의도 의미가 없다. 지하에 감춰둔 수십 개의 핵탄두는 그대로 놔둔 채 ‘앞으로 개발 않겠다, 사찰도 받겠다, 폐기도 하겠다’고 떠들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앞으로의 핵’은 ‘과거의 핵’이 완전히 청산된 뒤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

그러려면 비핵화의 순서를 바꿔야 한다. 일반적으로 비핵화는 핵 개발(실험) 동결→ 핵물질과 시설 신고→ 사찰→ 핵무기 폐기 순으로 진행된다. 이걸 ‘핵무기 폐기’가 맨 앞에 오는 순서로 바꾸는 것이다. 그럴 경우 순서는 핵무기 폐기→ 개발 동결→ 핵물질 신고→사찰 순이 될 터이다. 그동안 만든 핵무기부터 폐기하고 다음 절차를 밟자는 얘기다.

북·미관계 정상화와 연계한다면 이해하기 쉽다. 장차 북·미관계는 북의 핵확산금지협정(NPT)체제 가입→ 검증→ 핵 폐기→ 국교 정상화→ 평화협정 체결 순으로 이뤄질 것이란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이 순서도 ‘핵 폐기’가 맨 앞에 오도록 바꿔야 한다. 핵 폐기가 이뤄지고 곧바로 또는 거의 동시에 북·미수교와 평화협정이 이뤄진다면 굳이 검증이나 사찰 문제로 다투지 않아도 될 터이다. 북의 시간벌기니, 속임수니 하는 시빗거리도 물론 없을 것이다.

미국 측도 최대한 짧은 기간에 비핵화를 끝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백악관의 한 관리는 지난 10일 미국의 소리 방송(VOA)에서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접근 방식을 통한 과거의 협상들은 모두 실패했다”며 “북한이 시간을 버는 것을 허용하는 협상들에는 관심이 없다”고 밝혔다. 김정은이 최근 시진핑(習近平)과의 정상회담에서 언명한 ‘단계적 동시적 해법’에 대해 부정적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북이 특유의 살라미 전술로 가는 걸 용인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비핵화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생각인 듯하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는 지난달 31일 “첫 번째 핵무기 동결, 두 번째 핵시설 신고, 세 번째 국제원력기구(IAEA)전문가의 조사, 마지막으로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핵시설의 폐기가 필요하다”면서 "이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2020년까지 북의 비핵화를 완료할 계획이라는 보도(중앙일보 4월9일)도 있고 보면 시한은 대략 2년 내로 추정된다.

2년도 너무 길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새 김정은의 마음이 변하지 말란 법이 없고, 도널드 트럼프가 임기를 다 채우거나 재선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단계 때마다 이행방식을 놓고 밀고 당기기가 벌어지면 부지하세월이다. 호시탐탐 물어뜯을 기회만 노리고 있는 국내외 비판세력의 공격 또한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과거의 핵 협상이 그래서 다 실패했다. 그러면 또 등장하는 게 군사적 옵션이고 전쟁 위험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지겹도록 겪어온 일 아닌가.

통일부 차관(2011-2013년)을 지낸 김천식 교수(우석대)도 “초장에 북한의 핵무기와 핵물질을 폐기 또는 국외 반출하고, 이와 동시에 미·북이 수교하라”고 제안한다. 김 교수는 이외의 다른 방안들, 예컨대 진보세력이 지금도 애지중지하는 2005년 9·19합의 수준의 협상으로 되돌아간다면 과거의 실패를 반복할 뿐이라고 확언한다(조선일보 4월2일).

다행히 김정은은 여러 경로를 통해 비핵화에 대한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비핵화까지 걸리는 시간은 미국과의 협의에서 얼마든지 짧게 할 수 있다”는 뜻도 밝혔다(요미우리신문 4월8일). 그렇다면 한·미 양국도 짧고 굵게 나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회담 초입부터 핵 폐기를 요구하고 들어가는 역순(逆順)의 해법으로 나아가야 한다.

최종 상대는 ‘협상의 귀재’라는 트럼프다. 즉흥적인 것처럼 보여도 때릴 때 때릴 줄 아는 그가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는 최근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만약 우리가 (북·미 정상회담을) 5년, 10년, 20년 전에 했더라면 훨씬 더 쉬웠을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평소에도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는 실패한 정책이라고 공언해왔다. 그가 김정은을 어떻게 다룰지 짐작이 간다. 우리 쪽에서 섣부른 ‘단계론’으로 벌써부터 김을 빼는 건 현책이 아니다.

김정은이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응하지 않으면 비핵화에 대한 그의 의지는 다시 시험받게 된다. 이로 인한 불이익은 이제 전적으로 그의 몫일 뿐이다. 하지만, 미리부터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적어도 김정은이 그런 결단을 내리도록 최대한 설득은 해야 한다.

이런 발상과 행동만이 한·미동맹을 지켜내고 한반도의 비핵화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부당한 간섭을 차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누가 뭐래도 ‘운전석’엔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가 나란히 앉아야 한다. 4·27 정상회담의 진정한 성공은 그런 기회를 살려내느냐에 달려 있다. 문 대통령의 어깨가 실로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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