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⑪] 中 국공합작 성사… 독립운동,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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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4-09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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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급변하는 대륙의 정세… 임시정부는 어디로

[장정을 마치고 옌안에서, (왼쪽부터)저우언라이, 마오쩌둥, 보구.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이념대립은 어느 나라나 있다. 너무 조용해도, 너무 시끄러워도 발전이 없다. 토인비 식으로 말하면, 갈등은 도전, 통합은 응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란 특정 시점에서 한 사회가 허용하고 확장한 상상력과 지식의 결정(結晶)이므로, 그 깊이를 살펴보면 그 사회의 위기관리능력을 가늠할 수 있다.
문명은 물과 같아서, 이념 역시 흘러들어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수입된 이데올로기가 – 설령 그것이 최상위의 보편적 설득력을 갖는다 하더라도 – 기득권을 방어하는 도구로 토착화된다면, 문제해결능력은 더 줄어들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외환(外患)의 연장선상에 있다면? 그때 이념대립은 남의 장단에 춤추는 비극을 부른다.
이념대립은 독립운동마저 갈라놓았다. 그건 항일전을 치러야 하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중국은 넓다. 장제스는 일제가 기승을 부린들 대륙을 집어삼키지는 못할 거라고 확신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침략군을 앞에 두고 동포인 공산당부터 때려잡을 생각은 할 수 없다. 우리 사정은 다르다. 국권은 이미 넘어갔고, 남의 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신세다. 우리끼리 싸울수록 해방은 더 멀어진다.
 

[무령현에서 수당 가족.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부터 시누이 영원, 수당, 성엄, 조카 석동, 성엄 앞이 후동이다.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독립운동 하러 온 시누이
수당이 백범의 모친을 모시고 남경에 있을 때인 1935년 11월, 석오, 백범, 성재, 우천 등이 항저우에서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 수당 부부도 입당했다. 남편 성엄은 발기인이었으나, 임시정부와 떨어져 중국 관리 생활을 하느라 당무에 매진하지는 못했다. 정당이라고 해도 지금의 민주당이나 정의당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망명지의 지하정당이었다.
다음해, 막내 시누이 영원이 조카 석동(奭東)을 데리고 난징으로 왔다. 영원은 의친왕 이강의 아들과 약혼했던 사이였다. 동덕여중 다니면서 좌익계열 학생운동에 가담했고, 졸업하고 나서도 독서회를 조직해 후배들을 지도했다. 당시 일제는 명문 출신이 옥살이를 한다는 소문이 나는 걸 극구 꺼렸다.
잊을 만하면 잡혀오는데 구속도 못 시키니, 골치를 썩이던 종로서 형사가 하루는 집으로 찾아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이럴 거면 중국에 있다는 큰오빠 옆에 가서 독립운동인지 뭔지를 할 일이지, 왜 여기서 나를 못 살게 구는 거요? 기가 막힌 시어머니가, 그럼 보내줄 테냐고 묻자, 형사는 장담하며 제발 가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시누이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설 꿈에 부풀었다.
시동생 용한이 자살한 뒤, 그 충격으로 동서도 세상을 떴다. 동서는 아들을 큰어머니에게 보내 키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함께 산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건만, 동서는 그만큼 수당을 믿고 의지했다. 졸지에 고아가 되어 할머니 얼굴만 바라봐야 했던 조카에게도 탈출구가 필요했을 게다. 후동이보다 다섯 살 위인 조카가 소학교를 갓 마쳤을 때다.
시누이와 조카는 비밀리에 선을 대어, 수당에게 왔다. 백범의 모친을 모시고 있는 그 집이다. 좁은 집에 군식구가 둘이 늘자, 수당은 죄송했다. 곽낙원 또한 젊은 부부를 생이별시키는 게 미안했던 터라, 수당을 남편에게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성엄의 임지인 무령에서 다섯 식구가 살게 됐다.
 

[장제스가 백범에게 보낸 사진. 민국 34년 11월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백범 귀국 직전 전별기념으로 전달한 듯하다.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항일은 뒷전인 장제스
만주국을 세운 관동군은 베이징(北京) 코앞까지 밀고 내려왔다. 헌데, 장제스 휘하 백만대군의 총부리는 엉뚱하게도 남쪽인 장시성(江西省·강서성) 루이진(瑞金)의 공산당을 겨눴다. 1934년 10월,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홍군(紅軍)은 포위를 뚫고 서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대장정(大長征)의 시작이다.
장제스의 주력부대가 홍군을 쫓았다. 그는 공산당 토벌을 위해서라면 일본의 만주점령쯤은 불문에 부치겠다는 자세였다. 중국의 정세는 날로 민망해져갔고, 이에 따라 중국정부가 임시정부에 제공하던 지원도 끊겼다. 대륙이 내전에 휩싸이면서, 기왕에도 이념대립으로 분열되어 있던 독립전선은 만신창이가 됐다.
학생운동의 꿈나무였던 영원은 실의에 빠졌다. 국내에서도 허울 좋은 ‘문화통치’가 막을 내렸다. 배운 자와 가진 자들 사이에서 독립의 의지를 찾기란 힘들었다. 해방은 온전히 민중의 손에 놓여졌다. 성엄은 누이동생더러 돌아가서 시집가라고 했다. 수당은 말리지 않았다. 조카만 남았다. 동서의 유언을 지켜야 했다. 몇 년 지나, 석동은 광복군에 입대한다.

 

[시안사건을 주도한 장쉐량]


# 시안(西安)의 대반전
1935년 10월, 홍군이 산시성(陝西省·섬서성) 옌안(延安·연안)에 도착했다. 장정을 마치고 근거지를 확보한 공산당은 항일통일전선을 외쳤다. 그것은 거의 모든 중국인들의 뜻이기도 했다. 옌안에서 직선거리 200km 남쪽 시안(西安). 당나라의 수도 창안(長安·장안)이었던 이곳에, 장쉐량의 만주군과 양호성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홍군 토벌을 명령했으나, 병사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총 한번 못 쏴보고 만주를 내준 만주군이 특히 더했다. 다급해진 장제스가 시안으로 날아왔다. 바로 그 순간, 동아시아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대반전이 펼쳐졌다. “연공항일(連共抗日)” 의지를 굳힌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해버린 것이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내전 중단 및 국공합작(國共合作)에 합의했다. 장쉐량은 병간(兵諫, 신하가 군대를 동원해 주군의 뜻을 돌린다는 뜻)을 사죄하겠다며, 스스로 연금을 자청했다. 중국이 다시 하나로 뭉쳤다. 나치가 동부전선에서 그랬듯이, 군국주의는 대륙이라는 수렁에 빠졌다. 이제 독립운동에게도 선택의 시점이 다가왔다.
보도 통제로, 수당은 이 사건의 자세한 전말을 나중에 책을 읽고 알았다. 그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적어도 내가 중국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에 따르면 국내 자체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리나라를 둘러싼 일본, 중국 등 인접국 상황이나 수시로 변화하는 국제질서의 맥을 무시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장강일기>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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