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제주 4.3 사건,단정추진ㆍ저지세력 다 가해자..이익ㆍ명분위해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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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8-04-0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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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 생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상식 파괴

 3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주 4.3 사건 추모 영산재'가 열리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제주 4.3 사건은 수 만명이 학살당한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이자 이념적으로 제일 극단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사건이다.

1980년대까지 제주 4.3 사건은 철저히 '공산 폭도들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5ㆍ10 총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폭동을 일으켜 선량한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한 사건'으로 학교 역사 교과서 등에서 규정됐다.

반공을 자신들의 집권 정당성으로 내세운 박정희ㆍ전두환 군사독재 정권들의 입장에서 제주 4.3 사건은 이 같이 규정돼야 했다.

1990년대부터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제주 4.3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그 결과 당시 경찰과 군대, 서북청년회(이하 서청) 등이 죄 없는 주민들을 학살한 것 등이 드러났다. 주요 공중파 방송사 등 제도 언론에서도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제주 4.3 사건에 대해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은 위에서와 같이 대조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어느 쪽 말이 맞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양측 모두 완전히 틀리지도, 맞지도 않는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당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한 세력과 저지하려던 세력 모두 죄 없는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이는 한국 정부의 공식 조사 결과로 확인된 사실이다.

'제주4ㆍ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이하 위원회)'가 2003년 12월 발표한 '제주4ㆍ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이하 보고서)'에 따르면 위원회에 신고된 사망, 실종 등 희생자들을 가해자별로 분류하면 토벌대가 78.1%, 무장대가 12.6%, 가해자 표시를 하지 않은 공란이 9%다.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4.3 사건에 의한 사망, 실종 등 희생자 숫자를 명백히 산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며 "본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수는 14028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4.3 사건 전체 희생자 수로 판단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아직도 신고하지 않았거나 미확인 희생자가 많기 때문이다. 본 조사에서는 여러 자료와 인구 변동 통계 등을 감안, 잠정적으로 4.3 사건 인명피해를 25000-30000명으로 추정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말하는 토벌대는 당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한 세력에 속했던 경찰과 군인, 서청 등으로 구성됐다.

제주 4.3 사건 당시 대부분의 학살을 남한 단독정부 추진 세력이 자행했음을 한국 정부가 발표한 공식 조사 보고서에서도 인정한 것.

하지만 남한 단독정부 수립 추진 세력보다 학살한 사람의 숫자가 적을 뿐이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려던 세력도 적지 않은 죄 없는 주민들을 학살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보고서는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군 ㆍ경을 비롯하여 선거관리 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간인을 살해한 점은 분명한 과오이다"라며 "그리고 김달삼 등 무장대 지도부가 1948년 8월 해주대회에 참석, 인민민주주의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어 "무장대는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산하 조직으로서, 정예부대인 유격대와 이를 보조하는 자위대, 특공대 등으로 편성되었다"고 덧붙였다.

보고서는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ㆍ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ㆍ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말해 제주 4.3 사건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한 세력과 저지하려던 세력 모두 자신들의 이익과 명분을 사람의 생명보다 더 우선시했기 때문에 발생한 비극이다.

토벌대 중 특히 경찰 중엔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로서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살인적으로 고문하고 학살한 친일경찰들이 많았다. 이들에게 있어 통일정부 수립은 자신들의 숙청, 최악의 경우 사형까지 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돼야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수 많은 죄 없는 주민들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ㆍ10 총선거를 무산시키려는 세력이거나 이 세력에 협력한 사람으로 몰아 대량 학살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려던 세력 역시 '민족 분단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시해 적지 않은 학살을 자행했다. 제주도 현지 한 관광 안내원은 기자에게 "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려던 세력이 무장 봉기를 일으킨 것도 제주 4.3 사건에서 수 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한 한 요인"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당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려던 세력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을 모색했어야 했다는 평가도 있다.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의 파탄으로 남한 단독선거가 결정된 상황에서 무장투쟁으로 남한 단독선거를 무산시키려 하지 말고 남한 단독선거에 적극 참여해 남한의 실권을 합법적으로 장악하고 북한과의 통일을 추진했어야 했다는 것.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본인이 1994년 1월 펴낸 '나의 길 나의사상'이라는 책에서 "김구 선생이 처음에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것은 당연하지만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임박할 때까지 반대한 것은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신탁통치 아니면 단독정부 길밖에 없었던 것입니다"라며 "그러므로 신탁통치를 끝까지 반대할 생각이었다면 자신이 남한의 단독선거에 뛰어들어 남한의 대통령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남한의 실권을 쥐고 남북협상을 열어서 통일을 추진했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 당시 국민들은 단독정부를 밀고 나가려는 이승만 박사를 그리 크게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제헌국회 선거에서 그를 지지한 세력이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입증이 됩니다"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지난 1948년 실시된 5ㆍ10총선거 결과 총 200석 중 무소속이 85석을 차지한 반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가장 강력히 추진한 한국민주당은 29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당시는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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