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⑤] 등장인물 : 조국광복 위해 헌신한 요인, 이동녕·이시영·이동휘·김규식·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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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3-29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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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오 이동녕.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1869~1940)
무오독립선언 선포, 광복운동 주역
1906년 북간도에서, 헤이그 밀사 3인 중의 한 명인 이상설과 함께 한국 최초의 해외 사립학교인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했다. 1918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조소앙, 조완구, 김좌진 등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를 선포한 뒤, 상해에서 임시정부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의정원의장으로 선임되었다. 임정 수립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했으며, 망명지 중국에서 1940년 3월 13일 순국했다.

[성재 이시영.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신민회 결성·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우당(友堂) 이회영(李會英)의 친동생. 을사늑약으로 관직을 버리고, 안창호 등과 신민회(新民會, 1907)를 결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경술국치 후 6형제의 가산을 정리한 자금을 들고 만주로 망명해,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세웠다. 이 학교가 배출한 독립군들이 청산리대첩의 주역이 된다. 임시정부 초대 법무총장,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성재 이동휘.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1935)
한인사회당 결성, 임시정부 총리
1895년 한성무관학교에 입학, 대한제국 육군 참령(參領)을 지냈다. 1907년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강제 해산될 때 강화진위대를 이끌었으며, 이동녕,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를 조직해 개화운동과 항일운동을 벌였다. 1915년 연해주로 망명, 한인사회당을 결성했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임정 내 사회주의세력의 영수였다. 1921년, 레닌이 보낸 자금의 용처를 둘러싼 추문이 발생하자, 이에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했다.
 

[파리강화회의 무렵의 김규식(오른쪽)과 이승만.]
 

[해방직후 김규식.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1881~1950)
민족혁명당 주석·임시정부 부주석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언더우드의 고아원에서 성장했다. <독립신문>에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온 뒤, 연희전문 강사를 지냈다. 1913년 상해로 망명, 독립운동에 나섰으며, 여운형과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되었다. 1935년 약산 김원봉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족혁명당 주석으로 선임되었으며, 임시정부 부주석을 맡았다. 해방 후, 단정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을 주도했으며,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몽양 여운형.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
신한청년당 결성, 3·1운동 조직
1918년 신한청년당 결성을 주도하고, 총무간사로 활동했다. 재일유학생의 <2․8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을 조직했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애썼으며, 외무부 차장으로 활동했다. 고려공산당에 가입, 쑨원(孫文)의 권유로 중국국민당 당원이기도 했다. 1944년 8월 일제 패망을 예견하고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고, 건준 위원장과 인공 부주석을 맡았다. 단정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 1947년 서울에서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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