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202] 이태준은 왜 몽골에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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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3-28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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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이태준 추모 기념비 제막

[사진 = 이태준 추모비]

새 천년이 시작된 2천년 7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는 7월의 나담 축제 분위기로 무르익고 있었다. 복드산 아래 넓은 초원에는 나담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곳곳에 게르를 짓고 곧 있을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같은 때, 몽골 대통령궁이 자리 잡고 있는 복드산 북쪽 기슭에서도 한국인들과 몽골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의미 있는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20세기 초 몽골 땅에서 의사이자 독립운동가로서 값진 삶의 족적을 남긴 한 인물에 대한 묘비 제막식이 그 것이었다.
 

[사진 = 이태준 기념공원(울란바토르)]

1914년 몽골 땅에 들어가 1,921년 38살의 젊은 나이로 비운의 죽음을 맞은 이태준(李泰俊)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복드산 어딘가에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정확히 어디에 잠들어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진 = 공원 조성과정 설명]

그래서 그가 잠들어 있다는 복드산 한 기슭에 이태준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갖게 된 것이다.
 

[사진 = 이태준 공원 현판]

이태준의 행적을 찾고 그의 과거 활동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한국과 몽골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사이에 진행되는 동안 몽골 정부는 대통령궁 근처에 있는 복드산 기슭의 부지 2천 평을 제공했다. 그래서 뜻 있는 행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수백 년 만에 이은 한․몽 관계

[사진 = 이태준 초상화]

이태준이 몽골 땅에 들어간 것은 1,914년이었다. 그러니까 복드칸 정권이 출범한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였다. 그가 몽골 땅에 들어서 터전을 잡은 것은 한국과 몽골의 관계에 있어서도 의미가 있는 일이다.

고려가 무너진 후 몽골과 그들이 솔롱고스라고 부르는 한반도 사이에는 수백 년 동안 거의 교류가 없었다.
그 오랜 단절의 역사를 이은 인물이 바로 이태준이라는 점에서 그의 몽골행을 근세 역사에 두 나라의 관계를 이어주는 출발점으로 봐도 될 것 같다.

▶독립운동위해 몽골行

[사진 = 세브란스 의학교 재학 시절(둿 줄 왼쪽 네 번째가 이태준)]

1,883년에 태어난 이태준은 1,907년 세브란스 의학교에 입학해 1,911년 졸업했다. 그는 의학교 재학 중인 1,910년 고문 후유증으로 세브란스에 입원한 도산 안창호(安昌浩)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는 도산을 치료하다 민족을 사랑하는 도산의 자세에 감화를 받아 독립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사진 = 이태준 학적부]

그는 졸업 후인 1,912년 중국 남경으로 들어가 기독교 의원으로 의술활동을 펼쳤다. 그러다가 독립 운동가이자 사촌 처남인 김규식(金奎植)선생의 권유로 지금의 울란바토르인 후레로 가게 됐다. 당시 김규식은 몽골에 비밀 장교양성소를 설립하고 항일혁명단체를 조직할 계획을 하고 그를 몽골로 가도록 권유했던 것이다.

▶몽골 최고 훈장 받아
독립운동을 주목적으로 몽골에 갔지만 의사인 이태준은 몽골인들이 처한 의료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후레에 동의의국(東義醫局)이라는 병원을 열었다. 그의 헌신적인 의료 활동이 알려지면서 몽골인들은 그를 신의(神醫)로 떠받들기 시작했다. 이는 곧 복드칸 정부에도 알려져 젭춘담바 쿠툭투 8세의 어의로 활동하게 됐다.

그는 동시에 몽골 제일중학교 교사로서 일하면서 몽골인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헌신했다. 그 결과 1,915년 복드칸의 명령으로 몽골 최고 권위의 훈장을 수여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아 의열단에 가입한 뒤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또 헝가리출신 폭탄제조기술자 마자르를 통해 독립운동에 쓰일 무기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921년 후레를 장악한 뒤 잔인한 행동을 일삼던 反볼셰비키파 스테른베르그의 백군에게 붙잡혀 처형되고 말았다.
 

[사진 = 이태준 가묘]

당시 백군이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가 붙잡혀 처형된 것은 독립 활동과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게 해서 이태준 은 서른여덟 살의 젊은 나이로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하게 됐다.

▶70여 년 만에 드러난 행적
오래 동안 묻혀 있었던 이태준의 행적이 드러난 것은 지난 1,998년, 연세대가 한국 최초의 의사 배출 90주년 기념 강연회를 가지면서였다. 당시 외국어대 반병률(潘炳律)교수가 ‘세브란스와 독립운동’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이태준의 업적을 알렸다.

이후 이태준의 행적을 찾기 위한 운동이 울란바토르에 있는 연세친선 병원의 후배들과 몽골에 있는 한국인 사이에서 펼쳐졌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에르덴 오치르’훈장 수여 확인

[사진 = 에르덴 오치르 훈장]

이태준의 행적을 찾는 일을 몽골 국립문서보관소에서부터 시작했다. 그 곳의 소장은 몽골 동부 여행에 길잡이 노릇을 했던 역사지리학자 게렐 바트라흐였다. 찾아온 이태준선생 관련 서류는 1,915년 5월 30일자의 것으로 누렇게 빛이 바래져 있었다.

[사진 = 이태준 공적서(몽골 국립 문서 보관소)]

그래서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조명도 켜지 않은 채 촬영을 했다. 복드칸정부 당시 외무부의 문서는 몽골에 근무하고 있는 한국인 이태준의 공을 높이 평가해서 1,915년 복드칸의 명령으로 최고 투스멜 직위와 함께 ‘에르덴 오치르’ 훈장을 수여한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었다.

▶사라진 값진 삶의 흔적

[사진 = 몽골 제일중학교 교사시절]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이태준이 교사로 근무했다는 제일중학교였다. 수소문해서 찾아간 제일중학교 자리는 울란바토르 시내 중심가에서 서쪽에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학교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단지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허름한 주택들이 들어서 있고 그 주변에 현대식 주택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사진 = 복드산]

그 오래된 건물이 혹시 과거 학교 건물로 사용됐던 곳이 아니었을까 하고 알아봤지만 확인 할 수 없었다. 학교가 사라졌으니 다른 기록도 알아볼 길도 없었다. 이어 이태준이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복드산 일대를 둘러봤지만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려운 시기에 남의 땅에서 값지게 보낸 선지자의 특이한 삶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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