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①] 예쁘고 총명했던 스물한살 며느리, 상하이로 떠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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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연 기자
입력 2018-03-2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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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살이 빛이던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의 망명 기사 접해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역사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듯이, 독립운동 또한 그러하다. 독립의 어머니, 누이, 그리고 딸들. 우리는 그 이름들을 기억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건국의 어머니”라 호명한 수당(修堂) 정정화(鄭靖和, 1900~1991) 의사도 그 어른들 가운데 한 분이다.

그는 스물한 살의 나이로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상해로 탈출,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국내로 잠입해 임정밀사로서 자금조달과 국내통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26년 동안 한 결 같이 임정 요인들을 뒷바라지 하며 독립의 밑거름 역할을 실천했다.

우리 근현대사의 고통과 희망이 오롯이 담겨 있는 한 편의 드라마, 수당의 망명일기를 20회에 걸쳐 소개한다. 이 연재는 그가 생전에 구술한 회고록 <장강일기>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임을 밝혀둔다.



<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修堂) 정정화(鄭靖和) 1>

대륙으로 떠나는 열차

1920년 1월 초순, 경성역.

매서운 찬바람이 행인들의 웅숭그린 등판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지금부터 98년 전, “지구온난화”라는 개념이 나올 줄 상상도 못하던 시대. 그 시절 겨울은 훨씬 더 추웠을 게다. 오늘날 양극화가 막막한들 식민지 백성의 절망만 하겠는가.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민족을 뼛속까지 시리게 한 지 15년 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한 여성이 대합실 나무의자에 두 손을 모은 채 앉아 있었다. 발끝에 놓인 예사롭지 않게 큰 보따리가 먼 곳으로 가는 길임을 짐작케 했다. 쪽진 머리는 혼인한 표식이건만, 아낙이라 불리기에는 안쓰러운,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 그와는 대조적으로, 조신한 몸가짐과 처연하다기보다는 차라리 결연하게 비치는 눈매는 타인의 호기심을 거부하는 듯했다. 그이는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연로한 시아버지와 동갑내기 남편이 망명한 상해로 수천 킬로미터가 넘는 먼 길을 떠나, 귀국할 때까지 26년 동안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지키며 온갖 궂은일을 도맡았던 수당(修堂) 정정화(鄭靖和). 우리 역사가 임시정부의 며느리요 독립운동의 어머니로 기록해야 마땅할 그의 기나긴 여정은, 배웅하는 이 한 명 없이 의주행 열차에 몸을 싣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 “예쁘고 영리한 것”

군함과 대포를 앞세운 제국주의 열강이 지구를 집어삼킬 기세로 세계를 호령하던 19세기의 마지막 해인 1900년. 나라꼴은 참담했다. 망국만은 막아보려던 세 갈래의 몸부림. 갑신정변(1884)과 갑오농민전쟁(1894), 그리고 독립협회(1896~1898)의 분투는 외세의 개입, 무능한 조정, 내부 분열과 배신으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정정화는 그 해 태어났다. 고향 예산 대술면 시산리에서 “양대판서집”이라 올려보던 고관댁의 막내딸이었다. 그의 회고록 <장강일기>에 따르면, 무관이었던 조부는 아관파천(1896) 때 고종과 세자를 홀로 호위해, 그 공으로 왕실의 신임을 얻어 공조판서까지 올랐다. 부친은 판서와 동격인 정이품 수원유수를 지냈다.

그의 친정은 동포를 예속의 나락으로 떨군 조선왕조의 전형적인 양반집과는 가풍이 달랐던 것 같다. 아버지는 을사늑약의 치욕을 겪은 1905년 벼슬을 내던졌고, 17세 연상의 큰오빠 정두화(鄭斗和)는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독립의 길을 모색했다. 정두화는 3․1운동 직후 국내 최대 규모의 비밀독립결사였던 대동단 재정부장을 맡아, 당시로서는 거액인 3만원을 독립자금으로 냈다.

부친의 승인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정화가 어릴 적, 아버지는 그를 “예쁘고 영리한 것”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오빠를 따라 몰래 서당에 다니면서 천자문을 뗀 막내딸이었다. 기왕에 눈감아준 김에 독선생을 붙여 <소학(小學)>을 읽게 했다. 계속 공부를 했더라면 유학길에 올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뜻대로 안 되는 법. 수당은 열한 살 나이에 규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사진=김의한(왼쪽)과 정정화의 사진]



# 열한 살 맏며느리

1910년 가을, 경술국치의 충격이 워낙 컸던 탓일까. 황혼을 앞둔 할아버지가 당신 눈 감기 전에 손녀를 시집보내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일러도 너무 일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열한 살 계집아이는 꼼짝없이 족두리를 머리에 얹고, 가마에 올랐다. 수당이 “끔찍이도 고운 성품이었다”고 회상한 친정어머니의 품을 떠나.

시댁은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의 백운장(白雲莊). 인왕산 기슭에 있던 그곳은 동농의 청렴강직을 사랑한 고종이 창덕궁 중수공사(1904)에서 남은 자재를 하사해 지은 집이었다. 개화파의 비조(鼻祖)인 오경석(吳慶錫)의 장남이자 부자가 함께 금석문(金石文)의 대가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에게 고종이 특별히 감리를 분부했다는 백운장. 만여 평의 숲이 병풍처럼 둘러친 시댁에 들어서는 순간, 어린 며느리는 그만 기가 질려버렸다.

혹독한 시집살이. 그래도 수당은 시집살이란 으레 그런 것이려니 여기고,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인습의 굴레는 푸념으로 벗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은 덕분일까. 시집온 지 네 해만에 친정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삼년상이 끝나자 자신을 금지옥엽처럼 귀여워하던 아버지를 따라 친정식구들마저 낙향해 버렸다.

오직 위안은 자상한 시아버지와 동갑내기 신랑 성엄(誠广) 김의한(金毅漢)의 존재였다. 성엄은 한학(漢學)을 하다 뒤늦게 신학문을 배워, 중동학교에 다녔다. 소꿉친구 같은 남편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집안에서만 종종거리는 아내의 귀에 바깥세상 이야기들을 다정하게 속삭였다. 세계대전이 끝났다는 것, 많은 나라들이 독립했다는 것, 우리에게도 독립의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것….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수당의 가슴도 덩달아 뛰는 것이었다.



# 비바람아, 나를 맞아라!

어느덧 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망각의 늪에 민족의 운명을 맡겨 놓기에는 선각자들의 외침이, 일제의 수탈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919년 3월 1일. 삼천만 민중이 분연히 일어섰다. 수당 또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다. 그해 여름, 그이에게 견디기 힘든 불행이 닥쳤다. 첫딸을 낳자마자 잃었다. 어머니가 된 기쁨보다 핏덩어리를 보내는 아픔을 먼저 겪어야 했던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은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한을 곱씹던 시아버지가 만세운동으로 생기를 되찾았다는 것이었다. 수당은 몰랐지만, 동농은 대동단 총재로서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의 상해 망명을 추진하고 있었다. 동농과 이강은 사돈을 맺기로 약조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고, 당초 계획은 함께 망명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강은 뒤에 따로 출발했고, 안동에서 왜경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남편이 아무런 언질도 없이 시아버지를 모시고 나간 며칠 뒤, 시어머니가 말없이 신문 한 장을 내밀었다. “1919년 10월 10일, 동농 김가진, 장남과 상해 망명.” 수당은 두 분이 무사하다는 것에 먼저 감사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감시의 눈을 피해 친정아버지를 찾았다. “제가 상해로 가서 시아버님을 모시겠습니다.” 수당은 주저 없이 그 길을 선택했다.



“중국으로 가는 길, 상해로 이어지는 길. 이 길은 또한 이 나라의 땅덩어리 위에 발을 붙이고 사는 여인의 길이기도 하다. 모진 숙명을 뒤집어 쓴 20세기 벽두에 태어나 자라면서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배우듯이 스러져 가는 한 나라의 숨통을 지켜본 소녀가 이젠 여인의 이름으로 그 나라를 떠나가는 길이다.” (<장강일기> p49)



수당은 허리에 둘러찬 전대를 다시 한 번 쓰다듬었다. 그 속에는 친정아버지가 시아버지에게 전하라는 자금이 들었다. 기차가 출발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내 목적지는 상해. 거기에 어떤 풍파가 도사린들 마다하지 않으리라. 비바람아, 나를 맞아라!

 
정리=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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