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종 칼럼] 글로벌리스트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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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종 숙명여자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이병종 교수
입력 2018-03-25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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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종 숙명여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


바야흐로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이 시작되면서 전 세계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양국이 각각 수십조원에 달하는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고 이로 인해 미·중 간 무역 보복전이 전 세계로 확산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팽배하는 보호무역주의는 특히 한국과 같이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라에 치명타가 될 것이다. 한국 철강 제품 등 일부가 보복 관세 대상에서 제외될 것 같다는 보도로 한 시름 놓는 듯하지만 전혀 안심할 때가 아니다. 미국은 이를 미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대폭 손질할 태세이고 자동차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은 양보를 해야 할 듯하다.

이렇듯 파괴적인 보호무역주의가 21세기 들어 다시 기세를 떨치는 배경이 무엇일까? 일단은 각국에서 부상하고 있는 자국 우선주의, 민족주의, 반세계주의일 것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지구촌이 하나로 연결되며 이민의 증가, 교역의 증가가 가속화되고 이 과정에서 소외되고 피해 받는 계층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철강 단지 등 쇠퇴하는 러스트벨트의 백인 노동자들은 세계화에 대한 엄청난 피해의식을 갖고 있고 이로 인해 트럼프 대통령같이 자국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신고립주의자를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영국에서 브렉시트가 일어나고, 이탈리아·프랑스 등에서 극우 정당이 부상하는 것도 다 같은 이유이다.

여러 나라에서 권위적인 지도자가 갈수록 힘을 얻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뿐 아니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중국의 시진핑 주석,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이 각각 강력한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푸틴과 시진핑의 경우에는 실질적인 영구 집권까지도 도모하는 실정이다. 이 상황에서 타국과의 관계나 국제사회의 평판 등은 우선 순위가 밀리고 오직 국내 정치적 고려만이 앞서게 되는 것이다. 소위 글로벌리스트의 몰락이 오게 되는 것이다. 무역뿐 아니라 환경, 문화 교류, 안보 협력 등 여러 분야에서 글로벌주의는 쇠퇴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파리 기후 협약 및 유네스코를 탈퇴하고 나토의 동맹 체제를 흔드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보호무역, 자국 우선 주의가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서 약화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확산되어 1930년대 대공황 시대를 열었던 경쟁적인 보복 무역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커진다. 이런 위중한 시점에서 한국이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거대한 국제 무역 전쟁의 파고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역할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수수방관할 수는 없다. 현 정부가 협상단을 미국에 급파해서 철강 관세 유예 조치를 받아낸 것은 그런 면에서 적절한 조치였다.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도 품목별로, 또 국가별로 신속하게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지난 정부들의 성과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경제 위기와 관련해서 과거 김대중 정부의 노력은 충분히 평가할 만하다. 외환 위기로 인해 외환 보유고가 바닥이 나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으로 가까스로 국가 부도를 면한 상황에서 한국을 떠난 외국인 투자자들을 다시 불러온 일이 그것이다. 뼈를 깎는 구조 조정과 여러 가지 인센티브 제공을 통해 그들의 발길을 되돌렸고 그로 인해 한국은 불과 1~2년 만에 IMF 차관을 상환하고 정상 국가로 바뀔 수 있었다.

이명박 정부의 신속한 조치도 큰 성과를 보였다. 2008년 미국의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금융기관의 파산은 전 세계 금융위기로 확산되었고 이 와중에서 각국은 보호무역주의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의 현상과 비슷한 상황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 및 유럽, 심지어는 중국까지 자유무역의 신념을 바탕으로 협력을 도모했고 환율, 금리, 재정 등 여러 분야에서 공동 보조를 취해 위기를 막을 수 있었다. 여기서 작은 나라지만 한국도 큰 역할을 했다. G20 정상회의를 개최·주재하여 각국이 협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고 막후에서도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경주의 G20 재무장관 회의에서는 합의가 없으면 교통편 제공이 없다고 엄포 아닌 엄포까지 놓았다. 주요국과 통화스와프 등을 통해서 한국의 체질도 개선해 나갔다.

그로 인해 한국 경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빠르게 위기를 극복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세계 교역 및 경제도 다시 활력을 되찾아 정상 궤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최근 이명박 전 대통령은 비리 혐의가 드러나 구속되는 등 개인적으로 치욕의 나락에 떨어졌지만 그 정부가 보인 경제 위기 극복 노력에 대해서는 평가를 해줘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특히 글로벌 코리아의 기치 아래 세계에서 한국 경제 및 국가의 위상을 한 단계 높인 것은 큰 성과라고 생각된다.

물론 지금의 세계 경제 환경은 크게 다르다. 오바마 같은 포용적인 국제주의자도 없고 브렉시트로 대변되는 고립주의가 유럽연합 등 국제 협력 질서를 크게 흔들고 있다. 자유주의보다는 현실주의가 시대 정신이 되어 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 같은 개방 경제 국가가 앞장서야 한다. 무역이 아니면 경제가 휘청거릴 수 있는 한국 같은 나라는 이것이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작은 나라로서 엄청난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과 비슷한 위치에 처한 다른 중견 국가들, 특히 네덜란드·벨기에처럼 자원 없이 교역에 의존하는 나라들과 힘을 합쳐서 자유 무역의 중요성을 설득하고 나선다면 너무 지나친 과욕일까? 글로벌리스트가 몰락하는 현 시점에서 한국이 글로벌리스트가 되는 모습이 보고 싶다. 그것은 성과가 있든 없든 원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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