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그 후①]'가해자 남고 피해자만 떠난다'… 직장 내에도 '미투 바람' 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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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기자
입력 2018-03-2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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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성인권연대·제주여성인권상담소·제주여민회 등 여성단체가 19일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도내 모 금융기관에서 발생한 성추행 사건에 대한 20대 여성의 미투 선언문을 대신 낭독하고 있다.[연합]

"직속 상사가 습관적으로 성희롱을 했어요. 회사에 고발해봤자 욕먹는 건 나일 테고, 내부고발자로 여겨지는 것도 싫었어요. 결국 혼자 속앓이하다 회사를 나오게 됐어요. "

미혼 여성인 A씨(28살)는 지난해 대학원 진학을 핑계로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그는 유부남인 상사의 지속적인 성추행과 성희롱 때문에 퇴사를 결심했지만, '꽃뱀'이라는 오해를 살까 두려워 내부고발 대신 퇴사를 택했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조직에서 권력을 가진 상사가 부하에게 성희롱을 일삼는 걸 암묵적으로 용인해 왔다. 

드라마에서도 나이 많은 남자 상사가 술에 취해 여성 부하에게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맛'이라며 치근대는 장면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성 인지적 관점이 어느 수준에 머무르는지 잘 나타내는 대목이다. 

한국 사회가 성희롱 등 성 관련 이슈를 '문제'로 인식하게 된 건 ‘위계를 이용한 성폭력’을 폭로하는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유행하면서부터다.

지난 1월29일 서지현 검사가 자신이 당한 상사의 성추행을 공개적으로 폭로하면서 '한국판 미투 운동'은 들불처럼 사회 전역으로 옮겨붙었다. 

미투의 불길은 한국사회 각계에서 성범죄를 저지른 유명인을 단죄했고, 이제 일반인이 있는 직장내로 넘어왔다.

페이스북의 '대나무숲'이라는 익명게시판은 미투 운동의 본진과도 같은 곳이다. 권력을 가진 유명인 등에 대한 성추행·성희롱 고발이 난무하던 이 게시판에는 이제 유명인이 아닌 주변인에 대한 폭로가 끊임없이 올라온다.

최근 B씨도 페이스북 익명 페이지 중 하나인 '미투 대나무숲'를 통해 직장 상사의 성희롱을 고발하며 속에 쌓여있던 앙금을 털어냈다.

B씨는 "(상사가) 가슴 쪽 옷 위에 묻은 먼지를 말도 없이 손을 데어 떼어주거나, 엘리베이터나 복도에서 힘을 주어 껴안거나, 손 잡는 것을 강요하며 불쾌한 언행을 상습적으로 했다"면서 노골적으로 잠자리를 요구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어 "웃기는 건 그 사람이 직장내 성희롱 (방지) 교육 담당자였다"며 "형식적인 서류만 만들었지만, 담당자가 그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너무 어이가 없었다"며 분개했다.  

이같은 익명의 미투 폭로는 피해자가 직장내 성희롱에서 느끼는 공포를 잘 드러낸다. 

직장내 성희롱은 주로 '위계'에 의해 발생한다. 위계질서가 강한 한국사회 특성상 '을(乙)'의 위치에 있는 여성이 상사에게 불쾌감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퇴사 내지는 업계 퇴출을 각오해야 한다. 

성범죄 가운데 위계와 위력에 기반한 직장 내 비중이 가장 높다. 지난 19일 발표된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17년 상담통계 및 상담동향 분석 보고서'에서 지난해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성폭력 상담 1260건 중 직장내 관계에 따른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건수는 375건으로, 30% 비중을 차지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자들이 상사의 성희롱을 고발하면 회사 차원에서 보호를 해주기는 커녕, 파면이나 해임 같은 신분상 불이익을 비롯해 집단 따돌림과 폭행·폭언 등 '2중, 3중 피해'에 노출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때문에 상당수의 피해자는 회사를 떠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왔다.

서울여성노동자회는 2016년 직장내 성희롱 발생 후 72%가 퇴사했으며, 82%는 6개월 이내 회사를 나갔다고 밝혔다.

같은 조사 결과 가해자가 ‘상사’였다고 응답한 비율은 61%였고, ‘사장’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23%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2016년 경찰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피해자의 78.4%가 ‘참고 넘어갔다’고 답했다.

미투 운동은 피해자에게 사실을 알릴 '용기'를 부여했다. 
 
최근 5년 동안 '평등의전화'에 접수된 상담 통계를 보면 직장내 성희롱 상담 증가 추세는 2013년 236건에서 2017년 692건으로, 3배가량 증가했다. 미투 운동으로 성희롱·성추행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로 대두되면서, 사회 전역에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는 긍정적인 자정 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미투 폭로가 곧 가해자 신고 등의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폭로 이후 이어질 불이익 등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큰 탓이다. 

이에 정부는 직장인이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 없이 직장내 성범죄를 신고할 수 있는 대책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여성가족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범정부 협의체는 피해신고를 주저해 온 피해자를 위해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특별신고센터’를 설치했다. 센터는 지난 8일부터 6월15일까지 100일간 한시적으로 운영된다.

사건이 접수되면 센터에 배치된 전문 인력이 신고자와 상담을 거친 뒤, 국가인권위원회·고용노동부·감사원·소속기관·주무관청 등에 사건에 대한 조치를 요청하는 시스템이다.

그 후 재발방지 대책 수립요청 등을 진행, 신고한 피해자가 기관내에서 적절한 보호조치를 받으며 사건이 해결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여가부 당국자는 "지난 21일까지 센터에 접된 사건은 모두 291건, 여가부·고용부·교육부·문화체육관광부에서 각각 182건, 47건, 22건, 41건이 접수됐다"고 밝혔다.

여가부에 접수된 사건은 공공부분과 민간부문에 각각 114건과 68건이 접수된 것으로 확인됐다. 

센터를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최근 미투 운동으로 관심이 몰리자, 보여주기식으로 '반짝 행정'을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정현백 여가부 장관은 최근 "100일간 운영한 뒤 기간을 연장하거나, 상시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정부는 또 △직장내 성희롱 익명신고시스템(고용부) △대학 온라인 신고 센터(교육부) △문화예술계 특별신고·상담센터(문체부) 등을 운영 중이다.

일반적으로 정부의 성희롱 관련 업무는 고용부·여가부·국가인권위원회로 나뉘어 있다.

이 때문에 정부의 대처가 일시적이고, 효과적이지 않다는 의견도 나온다. 공공·민간 부문 모두를 포괄하는 범정부 차원의 성희롱, 성폭력 대응체계(기구)를 마련, 체계적인 대책 수립과 집행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황현숙 서울여성노동자회 부회장은 "직장내 성희롱 문제와 관련한 고용부의 시스템이 미진하고, 운영을 위한 정부의 지원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며 정부에 근본적인 해결책을 요구했다. 

고용부가 올해내 성희롱 등 남녀고용평등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근로감독관 47명을 전국 노동관청에 배치한다고 밝힌 것과 관련해서도 "사업장은 400만개인데 47명으로 어떻게 담당할 건지도 문제"라며 "감독관을 대상으로 한 체계적인 교육도 없어 문제가 산적해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황 부회장은 직장내 성희롱 대처에 대한 본보기로 독일이 시행하는 '성평등담당관' 제도와 미국의 고용기회평등위원회(EEOC) 등의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에도 직장내 성희롱 구제를 위한 '명예고용평등감독관' 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독일과 다르게 실질적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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