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친일女 1호 배정자②]거지,기생에서 여승으로...파란만장한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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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T&P 대표
입력 2018-03-19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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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의 은인 정병하, 처형된 시신으로 길거리에 내걸리고

영화 주제가 모음집 레코드판의 표지에 실린 배정자.


# 구하스님의 기억 속에서 찾아낸 분남

1882년 통도사. 솔향기 가득한 개울가를 걸으며 10세 소년은 12세 소녀에게 물었다. 
"우담, 너는 어쩌다 기생이 되었나?"
소녀는 돌아보며 눈에에 쌍심지를 켜며 쏘아붙인다.
"날더러 우담이라 부르지 마."
"그럼 뭐라고 불러? 계향이라고?"
"내 진짜 이름은 분남이야. 분남이라 불러."
"응. 분남아. 너는 왜...."
"기생이 되었냐고?"

말을 자르며 소녀는 계곡 옆에 있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 힘차게 던진다. 큰 소나무 줄기를 맞힌 돌은 계곡에 떨어졌다. 

"내가 세살 때 아버지는 민씨 정권을 반대하다가 대구감영에서 처형 당했어. 이후 노비로 신분이 전락한 어머니는 눈이 멀었고...밀양부에서 어머니에게 딸을 관기로 맡기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다고 그래서...그래서 내가 기생이 된 거야. 열 살에 말야. 딱 네 나이 때야. 2년을 견뎠지만 더는 못 참을 지경이 됐을 때 통도사 스님 하나가 내게 와서 이리로 오라고 하더군. 밥도 쫄쫄 굶어가며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그만 절을 눈 앞에 두고 현기증이 일어 쓰러지고 만 거야."

"너도 참, 인생이 얄궂구나. 어머니는 어떻게 됐어?"
"몰라. 날 팔아치운 사람인데 뭐하러 신경을 써?"
"그렇구나..."

구하는 업둥이로 들어온 자신만큼이나 버림받은 존재인 분남이 왠지 남같지 않았다. 동병상련의 마음에 순정이 슬쩍 싹 텄을까. 하지만 분남은 괄괄하며 제멋대로였다. 어느날 분남이 그를 불러냈다. 개울 건너편에 있는 바위 위에 둘은 올라갔다. 소녀는 쥐고온 보퉁이를 풀고는 밤과 호박잎에 싼 된장을 내놨다. 

# 분남의 첫사랑 전재식

"출출하지? 먹어. 업쭝아."
"업쭝이가 뭐야?"
구하가 묻자 소녀는 깔깔거렸다.
"등신아. 업둥이 중이니까 업쭝이지 뭐야."
"나 싫어. 업쭝이란 말."
"싫거나 좋거나 그게 너인데 어쩌겠냐? 업쭝이 더러 업쭝이라 하는데 뭐가 잘못됐냐?"
"너 자꾸 그러면, 이런 짓 한 것 스님께 다 이르고 말 거야....그리고 나 이 밥 안 먹을래."

분남은 그제야 소년을 달랜다.

"미안해. 니가 귀여워서 그렇게 부른 거야. 싫다면 안할게. 밥이나 먹자."

구하는 마음이 풀어져서 밥을 뜨는데 분남이 빤히 바라보고 있다. 소년은 불쑥 질문을 했다. 

"너, 기생 하면서 남자들 하고 자기도 했니?"

그러자 소녀는 깔깔 웃었다.

"바보야, 그럼. 기생인데. 열 번도 더 잤지. 넌 아직 그런 거 모르지? 가르쳐주랴?"

분남이 갑작스럽게 바싹 다가오자 구하는 깜짝 놀라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계곡 물 속으로 풍덩. 입에 밥을 가득 문 채로 소년은 허우적거린다. 분남은 다시 깔깔 댄다. 소년이 물에서 나와 젖은 저고리를 벗어 물기를 짜고 있을 때 그녀가 말했다. "기생할 때...날 무척 좋아한 사람이 있었어. 나도 좋아했고."

그 남자는 대구 중군(中軍) 전도후의 아들, 전재식이었다. 재식이 갑자기 일본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막 피어오르던 사랑도 도중하차할 수 밖에 없었다. 분남이 기생생활에서 의욕을 잃은 것도 그때쯤이었다. 

# 을미사변을 유발한 대역죄인 정병하

분남과 구하의 인연은 그리 길지 않았다. '도망친 관기'라는 소문이 나면서 일본 경찰이 찾아왔다. 분남은 체포되어 밀양부로 다시 가고 있었다. 이때 동래부사 정병하가 그녀를 극적으로 빼냈다. 1884년의 일이었다. 

정병하는 누구였을까. 분남의 아버지 배지홍과 교분이 있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민씨 일가에 대한 반기(反旗)를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사람인듯 하다. 일부 기록에서는 그가 분남을 구할 당시의 관직이 밀양부사였다고 하나 사실이 아니다. 정병하가 밀양부사로 부임한 것은 1888년 5월이었고 소녀에게 손을 썼을 때는 동래부에 있었다. 밀양부사가 된 그는 1890년 영남루를 대대적으로 고쳐지었다. 오횡묵이라는 분이 쓴 '경상도 함안군 총쇄록'에는 정병하의 '남루기(南樓記, 영남루 중수기)'가 실려있다. 그런데 정병하가 영남루를 리모델링한 기록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왜 그럴까. 그가 중앙 정계로 진출한 뒤 저지른 역적행위가 가장 큰 이유로 추정된다는 의견이 있다.(하강진 동서대 영상매스컴학부 교수)

정병하는 1894년 7월 밀양부사에서 물러나 서울로 올라갔다. 이듬해 명성황후의 폐비 조칙을 제정하는데 적극 가담한다. 일본군의 궁궐 침입을 부풀려 보고해 을미사변을 야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종의 아관파천 뒤 그는 김홍집과 함께 대역죄인으로 주살(誅殺)된다. 그의 주검은 길거리에 전시됐다. 배분남의 '흑기사'였던 정병하는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간의 알력 속에서 대원군 계열에 줄을 선 아버지 배지홍과 같은 운명을 맞는다. 하지만 분남은 정병하가 했던 행위보다 훨씬 더 큰 대역(大逆)의 길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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