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칼럼] 홍준표 대표, 크고 깊게 보았으면…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재호 초빙논설위원 · 동신대교수(정치학)
입력 2018-03-15 08:56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이재호칼럼]
 

[사진=이재호 초빙논설위원 · 동신대교수(정치학)]



남북, 북·미 간 정상회담 개최 의사에 대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반응은 다분히 부정적이다. “북한은 언제나 궁지에 몰릴 때면 안보 쇼를 해왔기에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국민 기망, 사기극이란 말도 했다. “회담이 성공하면 세계사에 극적인 변화가 올 것”이란 문재인 대통령의 기대와는 대조적이다. 홍 대표의 인식을 야당의 타성적 반대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급작스러운 상황 변화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점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정의용 안보실장을 비롯한 대북 특사단은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 “비핵화가 선대(先代)의 유훈”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핵화’가 혹여 ‘한반도 비핵지대화’는 아닌지 의문이다. 비핵지대화는 쉽게 말하면 미국의 핵 항모가 우리 영해에 들어와선 안 된다는 것으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보호까지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체결과정에서 논란이 됐던 개념이다.

‘선대의 유훈’도 말장난이다. ‘선대의 유훈’으로 치자면 김일성·김정일 이래 한결같은 ‘남조선 적화통일’만 한 게 없다. 헌법보다 상위규범인 노동당 규약에 명시된 지상과업이 적화통일이다. 핵개발도 이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비핵화가 ‘선대의 유훈’이어서 지키겠다면, 적화통일도 지켜야 한다. 누굴 놀리나? ‘선대의 유훈’이라고 했다고 해서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이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아버지 김정일도 ‘선대의 유훈’을 입에 달고 살았다.

김정은은 “핵무기는 물론 재래식 무기도 남측을 향해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 대체 누구를 향해 쓰겠다는 건가. 뻔한 거짓말을 인심 쓰듯 하고 있다. “한·미 군사훈련을 이해한다”고 했는데 이건 또 무슨 얘기인가. ‘그래, 내가 도발을 자주 하니까 남측이 한·미 연합훈련을 할 만하지, 그 처지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도발 야욕을 제 입으로 인정하는 발언이다(특사단 면담 때 김정은이 너무 흥분했던 것 같다).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어디 한둘일까. 특사단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대통령의 참모 한 사람은 비핵화의 ‘입구’에서 써야 할 전략과 ‘출구’에서 써야 할 전략을 혼동해 혼란을 가중시키기도 했다. 앞으로 본회담과 후속 실무협상에선 더 큰 논쟁거리들이 터져 나올 것이다. 제1야당의 대표이자 보수진영의 대변자 격인 홍 대표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 진보진영은 벌써 한껏 고양된 분위기다. 그들의 말과 글에선 낙관과 자신감이 묻어난다. BBC방송과 뉴욕타임스가 문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가능성까지 거론하고 있으니 그럴 만하다. 보수진영은 눈에 띄게 위축되는 모습이다. 홍 대표라도 부릅뜬 눈으로 살펴야 할 이유다.

그럼에도 나는 홍 대표가 열린 마음으로 사안을 보다 크고 깊게 봤으면 한다. 경위야 어찌 됐든 북한을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낸 건 긍정적인 면이 있다. 만에 하나 그 테이블에서 북핵문제의 근원적 해결인 CVID 방식의 핵 폐기-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에 실질적 진전이라도 이뤄진다면 어떡할 텐가.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그때도 ‘안보 사기극’이라고 비난만 할 건가.

남북, 북·미 간 정상회담의 잇단 개최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현상유지(status quo) 체제를 뒤흔드는 신호음일 수 있다. 전후(戰後), 70년 넘게 유지돼온 현상유지 체제가 깨진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국제질서 속에 던져지게 된다. 북핵 폐기가 북·미, 북·일 수교로 이어지면 한·미동맹 체제에 균열이 올 수 있다. 한반도의 분단은 고착화되고, 우리가 꿈에도 소원했던 통일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통일’이 올지도 모른다.

현상을 타파하려는 세력과 유지하려는 세력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이 바로 그런 경우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까. 물론 지금의 현상유지 체제가 더 평화롭고 안정된 체제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북핵 논의구조였던 6자회담이 제도와 규범(norm)에 기초한 상시적인 다자안보기구(체제)로 전환된다면 한 방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홍 대표는 이런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 남다른 상상력과 담대함으로 ‘포스트 현상유지(post status quo)' 체제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제시하고, 잠재적 위험도 드러내 국민이 알게 해야 한다. 시간이 걸리는 지난(至難)한 일이고, 우여곡절도 있겠지만 역사가 결국 그 방향으로 간다면 그 쪽 문을 닫아선 안 된다. 자칫하면 보수(保守)를 두 번 죽이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회담이 잘못돼 몰려올 후폭풍에 대처하는 일이 더 급하겠지만 지도자라면 마땅히 홑눈이 아닌 겹눈으로 시대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