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초대석] 김옥선 전 의원 "70년대 국회서도 벌어진 '미투'…가해 남성의원들과 나는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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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인해 기자
입력 2018-03-15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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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폭행 당했어도 숨기기 급급했던 시절

  • 女 의원 믿고 찾아온 피해자에 귀기울여

  • 1975년 '김옥선 파동' 속기록 복원 강조

김옥선 전 의원이 지난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아주경제 사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세구 기자 k39@]


하얀 와이셔츠에 붉은 넥타이. 정갈하게 빗어 올린 신사풍 머리 모양. 1992년 제14대 대선 후보 포스터 속 김옥선 전 의원(84)은 당시 유권자에게 '남장(男裝) 여자' 대선 후보라는 다소 황당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김 전 의원은 단순히 '이색 대선 후보'로 치부될 인물이 아니다. 그는 1967년 제7대 총선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 이듬해 재검표 끝에 국회에 입성했고, 이후 9대·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서슬 퍼런 유신 체제 시절 박정희 대통령을 "딕테이터(독재자) 박"이라고 정면 비판했다가 금배지를 박탈당했다.

지난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아주경제 사옥에서 김 전 의원을 만났다. 다소 야윈 얼굴엔 세월의 그림자가 드리웠지만, 칼칼한 목소리가 활기 넘쳤다.

◆"신민당 당기위원장 시절, 여성들 찾아와 미투 호소"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 이야기를 먼저 꺼내 들었다. 미투 폭로가 최근 정치권을 덮치면서, 국회 내 폐쇄적·수직적 구조와 조폭 문화 문제가 대두됐다. 김 전 의원이 현직 의원으로 활동했던 1960~1980년대는 남존여비 사상이 더 뿌리 깊던 시절이다.

김 전 의원은 미투 운동 자체에 대해서 "찬반양론으로 얘기한다면 찬성도 반대도 어려운 처지"라며 언급을 자제했다. 다만 한국 사회의 왜곡된 성 의식은 문제가 있다고 짚었다.

그는 "한국 사회엔 '여성의 순결성'이란 개념이 있다. 그런 일(성폭행)을 당했어도 감추는 게 동양의 미덕이고 우리나라의 미덕"이라며 "우리나라는 음탕한 나라, 말하자면 아주 저급한 나라다"고 말했다.

과거 여의도에도 '제한적 미투'는 있었다. 김 전 의원이 1970년대 신민당 당기위원장 재직 시절 많은 여성이 "성(性)이 같은" 그를 찾아와 어려움을 호소했다고 했다.

김 전 의원은 피해 여성이 자신을 찾아온 국민이기에 차도 대접하고 밥도 대접하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러면 대개 '몸 뺏기고 돈 뺏겼다'는 이야기가 병행했다.

당시 강간·강도 행위를 입증하는 게 쉽진 않았다. 여성이 온몸이 묶여 성폭행당한다거나 남성이 권총·칼을 갖고 위협해서 돈을 뺏은 게 아니라면, "피해 여성이 망신당하던" 시절이었다.

김 전 의원은 남성 의원들에게 정신적 보상은 못 해주더라도 물질적으로 가져간 건 갚아주라고 따졌다. '국민 한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만든다면 당신 국회의원 자격 없다'고 몰아붙이기도, 후배 의원들을 잘 달래서 돈은 갚아주는 것으로 사건을 수습하기도 했다.

국회 내 성차별을 묻는 말엔 '역차별'을 말했다. 그는 "여성이 평등권을 주장하려면 정정당당하게 일대일로 대결하라"고 했다. "그렇지 않고 여성 후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프리미엄을 달라고 애걸해선 안 된다"고도 했다.

◆"김옥선 파동 아닌 민주항쟁···삭제된 속기록 복원해야"

김 전 의원 하면 '남장 여성 정치인'이 떠오르지만, 정작 자신은 남장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19살에 사회복지법인 에벤에셀 모자원을 설립, 사회사업에 발을 디디면서 군인 바지, 잠바때기 등 '작업복'을 입은 게 시작이었다. 이후 학교법인 송죽학원(정의여중·정의여고·원의중)을 운영하며 "교장 선생님이 작업복을 입을 순 없으니까 정장을 입은 것"뿐이다.

국회에서 남성 정장을 입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행사 때마다 강단에 올라앉은 적이 많았다. 치마를 입고 오래 있으면 자세가 흐트러지기 때문에 바지 입는 게 편했다. 스님이 법복을 입고 군인이 군복을 입는 것처럼, 김 전 의원에게 양복은 "유니폼 개념"이었다.

'김옥선 파동'에 대해선 "김옥선 민주항쟁"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1975년 10월 8일, 그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딕테이터 박'이라 부르며 유신 정권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제명 처리 직전 기자회견을 열고 자진사퇴했으나, 이듬해 선거법 위반 판결을 받고 10년간 정치생명을 박탈당했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국민과 국가에 도움이 되려면 죽고 사는 게 겁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신 속기록 복원만은 강조했다. 국회 속기록은 사초(史草), 즉 역사의 기초인데 이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없애선 안 된다는 것. 김 전 의원은 수년 전부터 "삭제된 국회 본회의 회의록을 복원해달라"고 국회 청원을 냈으나 진행이 지지부진하다고 아쉬움을 내비쳤다.

김 전 의원은 14대 대선 출마 이후 정치와 한 걸음 떨어져 있으면서도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좋은 정치인을 배출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가 첫손에 꼽는 정치인의 자질은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정치 지도자는 '국가=가정'으로 생각하고, 본인의 가정은 가장 끄트머리에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정치 하지 말고 앞치마 입고 가락국수를 말라"고도 했다.

요즘 정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묻자 "내가 평가할 처지가 아니다"며 말을 아꼈다. '다당 정치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되묻자 "남의 정당을 잘한다 못 한다 시시비비할 게 못 된다"면서도 "당리당략이 국가와 국민에 우위하지 않는다. 이게 내 대답이다"고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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