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99] 복드칸 정권은 어떻게 탄생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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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3-23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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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신해혁명으로 무너진 淸

[사진 = 영화 ‘신해혁명’ 포스터 (백주년 기념 중국 영화) ]

1,911년 중국 호북성 무창(武昌)에서 군사봉기가 일어났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혁명이 전국을 휩쓸면서 청조는 무너지고 있었다. 혁명파는 이듬해 정월 초하룻날 남경(南京)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손문을 임시총통으로 선출했다. 그 것이 바로 신해혁명(辛亥革命)이다.

이로서 260여 년에 걸친 청 왕조의 통치가 끝나고 2천년 이상 이어진 황제통치시대도 막을 내렸다.

▶복드칸 정권의 탄생
신해혁명이 계속되는 그 시기, 청나라 체제가 흔들리면서 몽골에서도 반청(反淸)운동이 급속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부터 몽골 내부에서는 반청, 반한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청나라가 교묘한 방법으로 몽골을 통제하면서 몽골인들 사이에는 몽골의 미래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몽골의 전통적인 가치체계를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 생기기 시작했다. 청나라 말기에 높아지고 있던 반청(反淸) 기운은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면서 급기야는 독립운동으로 옮겨갔다. 할하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상층부 왕공과 승려들이었다.
 

[사진 = 울란바토르]

몽골인들은 할하 지역의 중심이자 청나라의 몽골 지배 거점인 후레(현재의 울란바토르)에서 청나라 관료들을 추방했다. 그리고 1,911년 12월 1일 독립을 선언했다. 그들은 활불 젭춘담바 쿠툭투 8세를 국가수반으로 추대했다. 이 새로운 정권이 복드칸(몽골어로 황제의 의미)정권이다.

몽골이 독립을 선언한 것은 무창 봉기가 일어난 지 50여일 만이었다.

▶주종관계 소멸이 독립의 명분

[사진 = 복드칸 8세 부부]

복드칸 정권의 당초 목표는 청조 지배 아래 있었던 몽골인들을 재통합해 독립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 살고 있는 브리야트인들은 그 대상에서 제외됐다. 몽골이 독립을 선언하게 된 논리는 몇 차례 언급했던 대로 청나라와 몽골 사이의 주종 관계가 소멸됐기 때문이었다.

즉 몽골 대칸의 옥쇄를 지닌 만주인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체제가 무너지고 있다면 주종 관계도 마땅히 소멸돼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청조를 밀어내고 중국 본토에 새롭게 등장한 중화민국(中華民國)은 몽골인들에게 한인들이 권력을 잡은 한인정권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몽골인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화민국이 청나라의 몽골에 대한 통제권을 계승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또 복드칸 정권이 들어서면서 티베트 출신이 몽골 황제로는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티베트 불교가 몽골 사회 깊숙이 침투해 있는 상황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장 존경받는 활불은 출신에 관계없이 어떤 몽골의 귀족보다, 칭기스칸 혈통을 계승한 귀족보다 더 적합한 몽골 통합의 상징으로 인식된 것이다.

▶몽골 주변 국제 이해 엇갈려

[사진 = 복드칸 궁전]

복드칸 정권은 내무부와 외무부, 재무부, 법무부. 국방부 등 다섯 개 부와 불교계를 총괄하는 종무원 그리고 총리부와 상하 양원으로 진용을 갖췄다. 정권 초기에 주도권을 장악한 사람은 러시아에 밀사로 다녀왔던 활불 승려 체렌치메드였다.
 

[사진 = 체렌치메드]

내몽골 지역에서도 상당한 인물들이 후레로 와서 복드칸 정권에 참여했다. 하지만 복드칸 정권은 청나라의 붕괴라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등장한 정권인 만큼 존립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그래서 외부의 도움, 특히 러시아의 원조를 기대했다. 그러나 러시아로서도 몽골의 독립을 마냥 지원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청조가 무너지면서 몽고를 둘러싼 주변 지역은 여러 나라의 이해가 엇갈려 있는 상태였다. 이미 일본은 남만주를 세력권에 넣고 내몽골 동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려 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미 1,907년과 1,910년 두 차례의 걸친 협약을 통해 외몽골이 러시아의 세력권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복드칸 정권을 앞세워 내몽골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는 경계했다. 특히 미국은 청조가 무너지는 와중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경계하고 중국의 영토 보전을 강력히 호소했다.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복드칸 정권이 내세우는 내몽골을 포함한 전 몽골의 독립 주장을 지지하기가 어려웠다.

▶외몽골 자치․중국 종주권 인정

[사진 = 몽골 대통령궁 입구]

그래서 러시아는 외몽골만의 독립을 지지하고 형식적으로는 북경정권의 종주권을 인정하되 실질적으로는 외몽골의 자치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1,912년 11월 러시아와 몽골은 복드칸 정권의 자치를 허용하는 내용의 러․몽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서 러시아는 복드칸 정권의 자치를 승인했다. 그러면서 몽골지역에서 러시아의 폭 넓은 경제적 권익을 승인하도록 만들어서 이익을 챙겼다. 이듬해 11월 러시아와 북경정부 사이에 외몽골 자치에 관한 선언이 교환됐다.
 

[사진 = 러시아 카흐타]

내용은 러시아가 의도한 대로 러시아는 외몽골에 대한 중화민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북경정부는 복드칸 정권의 자치를 보증하는 것이었다. 1,914년부터 러시아의 국경도시 캬흐타에서 열린 복드칸 정권과 러시아 그리고 북경정권이 참여한 삼자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이 최종 타결됐다.

1,914년 9월부터 1915년 7월까지 10개월 동안 이어진 교섭은 결국 러시아가 의도한대로 결말이 지어졌다. 몽골로서는 전체 몽골인의 통합과 독립이라는 당초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었다. 중국측 입장에서는 명목상의 권리만 인정받고 사실상 외몽골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게 됐지만 전체 몽골의 독립을 막은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청나라가 붕괴한 후 몽골을 둘러싼 지역질서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당시 복드칸 정권의 영역은 ‘외몽골과 다리강가 지방’으로 돼 있었다. 이것은 대체로 현재 몽골의 영토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니까 이때 책정된 영토가 오늘날 몽골 영토의 기원이 됐다는 얘기다.

▶내몽골 통합의 어려움

[사진 = 울란바토르 게르촌]

당시 내몽골의 상당수의 호쇼가 복드칸 정부에 합류하기를 희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이 맞지 않아 실현되지 못했다. 내몽골이 복드칸 정권에서 제외된 것은 국제적인 이해관계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통합되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외몽골인 할하 지역은 오랜 청나라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지역적인 연대와 통합이 유지되고 있었다.

반면 내몽골 지역은 앞서 언급한 대로 한인 이민자가 대거 유입돼 있는 상태라 완전한 몽골이라고 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초원의 농지화도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된 상황이라 유목질서가 유지된 외몽골과는 사정이 딴판이었다. 각 기(旗)별로 이해가 엇갈리고 분열돼 있는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정세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가 북경정부의 압력에 고개를 숙이고 그 속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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