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97] 몽골판 임꺽정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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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3-21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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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순한 양처럼 살았나?
철저한 통제로 기를 억눌러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청나라의 지배 아래서 몽골인들은 모두 순한 양처럼 변해 복종하며 살았을까? 꼭 그랬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청조에 대항했던 트로이반디

[사진 = 실린복드]

1,999년 8월 초하루 이른 아침, 중국과의 국경선 근처에 있는 몽골 동남부의 다리강가 지역에서는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한 인물을 기억하는 행사를 펼치고 있었다. 근처에 있는 몽골의 성산(聖山) 실린복드의 흙을 가져다 구어서 만든 한 인물의 좌상(坐像)을 세우고 그를 되돌아보는 행사였다.

좌상으로 형상화된 인물의 이름은 트로이반디, 그는 청나라 지배 시절 근처 실린복드산에 근거지를 두고 청조에 대항하며 투쟁했던 인물이었다.

▶자생적 의적(義賊)의 연대

[사진 = 참배하는 몽골인]

청나라의 정치적 통제와 경제적 수탈의 구조 속에서 생활고를 겪게 된 많은 몽골인들은 삶의 터전인 초원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 가운데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청나라의 지배에 맞서 싸우는 소규모 집단이 여기저기에 생겨났다. 그들은 주로 청나라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산 속 등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청나라에 대항해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데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들은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아 청나라에 대항했다. 인근 지역의 청나라 파견 관리나 병사 또는 청나라에 협조하는 몽골 고위층을 습격해 재물을 빼앗은 뒤 주변의 어려운 몽골인들을 도와주는 일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거기서 좀 더 효율적으로 투쟁하는 방법은 각 지역에 산재해 있는 집단과 서로 정보를 교환해가며 활동하는 정도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의적(義賊)이었다.

▶몽골판 임꺽정

[사진 = 트로이반디像]

이들 의적 가운데 다리강가 근처 지역에서 활동했던 몽골판 임꺽정 같은 인물이 바로 트로이반디였다. 그는 1,830년에 태어나 1,904년에 숨진 인물이다. 그러니까 청나라의 몽골 지배 후반기에 행동했던 인물이다. 다리강가 출신인 그는 현재 중국 땅이 눈에 들어오는 국경선 주변의 우뚝 솟은 실린복드 산 속에 자리를 잡고 동과 서로 오가며 활동을 했다.
 

[사진 = 의적 트로이반디상]

2백여 개의 화산 분화구가 있는 이 지역의 산들은 거의 민둥산 모양을 하고 있어 숨어 활동하기에는 적합지 않아 보였다. 과거 우리 역사에서 의적으로 불리었던 사람들이 빽빽한 숲으로 은폐된 깊은 산 속에 거처를 마련했던 것과는 사뭇 환경이 달랐다. 트로이반디가 이끄는 무리는 실린복드산 중턱 후미진 동굴 같은 곳에 자리 잡았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실린복드산에는 그들이 사용했던 우물 등이 남아 있다고 들었지만 그 산에 올랐던 필자는 결국 그 흔적은 찾아내지 못했다.

▶열 가지 이미지 담은 의적상

[사진 = 의적상 건립행사(실린복드, 1999년)]

백년 전후의 세월이 지난 뒤 몽골인들이 트로이반디의 좌상을 세우면서 담아 놓은 뜻을 새겨보면 그들의 활동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었다.
 

[사진 = 도렌툭스(의적상 제막준비위원장)]

의적상(義賊像) 제막 준비위원장인 도렌툭스의 설명은 이랬다. “그가 어떻게 생겼고 키가 얼마였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사진 = 의적 트로이 반디]

고향 사람들은 거의 사망했고 그의 아는 사람들도 거의 떠나갔기 때문에 정확한 모습을 만들어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열 가지 이미지를 형상화해서 상을 만들었다. 앉아 있는 모습은 넓은 땅을 의미한다. 한쪽 어깨의 옷을 내리고 있는 것은 말(馬)이 많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옷을 입는 방식이다.
 

[사진 = 실린복드서 본 중국 땅]

그의 시선이 위로 향하고 있는 것은 몽골 사람들이 그를 아버지처럼 존경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그가 중국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것은 시간이 흘러가더라도 중국을 언제나 조심하라고 경고를 보내는 의미다. 불의 형상을 들고 있는 것은 언제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는 의미로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좌상을 통해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남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사는 길인지를 알려주려 했다.”

▶찻잔 속의 태풍에 머문 저항

[사진 = 청나라 관리의 고문 (몽골 국립박물관)]

청조 아래서 몽골인들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인물가운데 트로이반디처럼 몽골인들이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곳곳에서 나름대로 저항 세력이 저절로 형성되기는 했지만 그 것이 청나라의 지배라는 큰 물줄기를 돌려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찻잔 속의 태풍 정도에 불과했다는 얘기다.

그래도 그들은 청나라의 억압과 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는 적지 않게 기여했다. 실제로 청나라의 교묘한 통치 아래서 강력히 억제돼 왔던 몽골 재통합의 움직임은 청나라의 힘이 약해지면서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고개 드는 몽골 민족주의

[사진 = 남경조약(1842년)]

1,842년 아편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국이 청나라와 남경조약을 맺은 것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의 청나라에 대한 공세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은 해상(海上)으로부터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다. 반면 러시아는 육상(陸上)으로부터 대륙을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국제적 패권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 몽골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만주까지 자신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국제적 이해관계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됐다. 19세기 중 후반과 20세기 초 청나라를 중심으로 한 열강들의 세력 다툼은 널리 알려진 얘기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그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청나라의 힘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고 그 결과 몽골에 대한 장악력도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틈새를 비집고 몽골 민족주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의 축은 티베트 불교의 승려들과 몽골의 귀족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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