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95] 왜 너도 나도 승려가 되려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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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3-19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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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같은 종교 신봉에서 빚어진 대결

[사진 = 티베트불교 승려 행진]

16세기 말, 알탄 칸의 주도로 이루어진 티베트 불교 개종이후 이 종교는 몽골에 급속히 확산돼 나갔다. 초원 곳곳에 사원이 들어서고 많은 젊은이들이 승려가 됐다. 그래서 몽골인들의 생활은 이 종교의 틀 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정치적 사건의 배경에는 종교적인 요인이 도사리고 있을 정도로 티베트 불교는 몽골의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갈단의 할하 공격이 그랬고 티베트를 둘러싼 청나라와 준가르의 대결이 그랬다. 몽골인과 만주인의 잦은 대립과 충돌은 서로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야기된 것인지도 모른다. 준가르인들이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지 않았다면 티베트를 공격해 청나라와 대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청나라가 티베트 불교를 믿지 않았다면 준가르를 몰아내기 위해 티베트에 군대를 보내지 않았을지 모른다. 다시 말하면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사이에 티베트를 둘러싼 몽골군과 청나라군의 움직임은 달라이 라마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쌍방이 군사를 일으킨 결과 결국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무릎을 꿇는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티베트 불교 신봉자 건륭제(乾隆帝)

[사진 = 문수보살 화신 묘사 건륭제]

강희제의 손자이자 옹정제의 다섯째 아들인 건륭제는 청나라의 황금기를 연 군주다. 할아버지 강희제를 닮고 싶어 했던 그는 60년 재위기간 동안 정치 경제 군사적인 측면은 물론 학문과 예술 분야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래서 강희제와 옹정제 그리고 건륭제가 재위했던 134년을 강건성세(康乾盛世), 또는 강옹건성세(康雍乾盛世)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 역대 청나라 황제들은 대부분 티베트 불교에 빠져 있었다. 그 가운데 몽골 정복을 마무리 지은 건륭제는 가장 열렬한 신봉자였다.

[사진 = 열하 보락사(普樂寺)]

열하(熱河)는 청나라 황제의 티베트 불교에 대한 열정이 형상화된 곳이다. 보살왕으로 알려진 황제는 여름이 되면 그 곳에 체류하면서 몽골이나 만주의 영주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야외에 천막을 치고 주연을 베풀거나 사냥을 즐기면서 지냈다. 열하의 땅은 바로 황제가 유교원리로 짜여 있는 북경에서 벗어나 만주인의 정체성과 티베트 불교에 대한 깊은 신앙심을 확인하는 장소였다.
 

[사진 = 피서산장의 성벽]

그래서 피서산장 주변에는 많은 티베트 불교 사원이 세워졌다. 토르구트 귀순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보타종승지묘는 이미 소개한 적이 있지만 그 외에도 많은 사원들이 세워졌다. 보녕사(普寧寺)와 수미복수묘(須彌福壽廟) 대소사(大昭寺) 등 여덟 개의 티베트 불교 사원이 피서산장 둘레에 세워졌다.
 

[사진 = 피서산장의 가을]

대부분의 사원들은 티베트의 유명 사찰을 모방한 것이어서 어찌 보면 열하는 티베트의 라싸를 재현한 도시나 마찬가지였다.

▶몽골지역 티베트 불교 확산
몽골을 완전 지배 아래로 넣는 등 청나라의 영토가 확대되면서 건륭제의 티베트 불교에 대한 열정은 더욱 높아졌다. 1,780년 자신의 칠순 생일 때는 티베트에서 판첸 라마(달라이 라마에 이은 티베트 불교 2인자)를 초대한 뒤 자신과 같은 자리에 앉혀 신하와 외국 사절의 예를 받도록 만들기도 했다.
 

[사진 = 산장 게르촌의 연회(열하)]

이때가 바로 연암 박지원이 포함된 조선의 사신단 일행이 건륭제의 7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열하를 방문했던 때였다. 연암은 이때 본 판첸라마에 대한 좋지 못한 인상을 열하일기에 기록하면서 티베트 불교에 대한 경멸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건륭제에게 판첸 라마의 초청은 티베트 불교에 대한 자신의 정열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기회였다.
 

[사진 = 건륭제 신년하례]

건륭제는 이후 북경 교외의 향산(香山)에 티베트 불교 사원을 짓는 등 자신의 관심을 확산 시켜나갔다. 물론 이미 티베트 불교가 터전을 잡은 몽골지역에도 더욱 이 종교를 확산시켜 나갔다.

▶정치적 목적 강했던 종교정책
그러나 청나라가 몽골에서 티베트 불교를 확산시키려했던 정책은 단순히 종교적인 측면보다는 정치적인 목적이 더 강했다. 티베트 불교의 확산을 통해 몽골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가능성의 싹을 잘라 버리자는 것이 바로 그 것이었다.

몽골의 용맹한 전사들에게 활이나 칼 대신 불경을 손에 들게 만든다면 가장 쉽게 그들을 무력화시키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몽골의 젊은이들을 대거 라마승으로 유도하는 조치를 취했다.
 

[사진 = 간단사 승려]

물론 여기에는 당근도 함께 제시됐다. 병역을 면제시켜주고 세금도 감면시켜준다는 것이 그 것이었다. 승려로 출가하는 것을 장려하는 가정은 복을 받고 출가를 막는 가정을 죄를 받는다는 내용도 널리 선전했다.

▶승려 지원 과열 열풍 초래

[사진 = 노인과 어린이 승려]

이 같은 시도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켜 청나라로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너도나도 승려가 되겠다고 나섰다. 그도 그럴 것이 맹기제 등으로 극도로 궁핍한 생활에 빠져든 유목민들에게 승려가 되는 길은 일종의 탈출구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남자를 둔 가정에서는 숫자에 관계없이 관청에다 출가 신청서를 내밀었다.

출가신청서를 접수하고 대상자에게 이를 인정하는 도첩(圖牒)을 발급하면 그 즉시 병역면제와 감세 혜택이 발효됐다. 많은 남성들이 말에서 내려 사원으로 몰려들었다. 승려가 되겠다는 과열 열풍이 일면서 몽골 남성 인구의 절반 이상이 승려가 되는 진기한 현상도 나타났다.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겠지만 30%에서 60%의 남성이 승려가 되는 기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사진 = 간단사 법당 내부]

자연히 기마 민족의 사납고 용맹한 기질은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교리에 따라 점차 순화될 수밖에 없었다. 부처님의 자비로운 손길에 따라 순한 양처럼 변했으니 청나라로서는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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