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근의 차이나 무비⑧] 反봉건 근대교육 기수에서 마오쩌둥 권력 장악 희생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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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근 한국외대 교수
입력 2018-03-07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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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쑨위 감독 ‘무훈전(武訓傳)’

중국에 사회주의가 들어선 이듬해, 그러니까 1950년의 일이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영화 한 편이 탄생한다. 1930년대 상하이(上海)를 주름잡던 감독 쑨위(孫瑜)가 연출을 맡고, 인기의 절정을 구가하던 배우 자오단(趙丹)이 주연을 맡았다. 그 덕에 더 유명세를 탔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무훈전(武訓傳)’은 말 그대로 무훈이라는 사람의 일대기를 그린다. 무훈은 청나라 말엽 산둥(山東)에서 나고 자랐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글도 배우지 못하고 그저 어쭙잖은 길거리 연희로 근근이 살아갔다.

글을 배워야 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어렵게 모은 돈을 들고 사숙을 찾아가지만 비웃음을 당하고 쫓겨나고 만다. 얼마 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는 구걸을 거듭하며 살 길을 찾는다.

열일곱이 되던 해 장거인(張擧人) 집의 머슴으로 들어가지만 장거인은 글을 모르는 자신을 속여 3년 동안 일한 값을 한 푼도 주지 않는다.

30년 세월이 흐르고 온갖 고생 끝에 돈을 모은 무훈은 드디어 의숙(義塾)을 열게 된다. 무훈은 혼자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엄마, 드디어 저도 글을 배우게 됐어요.”
 

‘무훈전’의 한 장면, 가운데 앉은 이가 무훈 역의 자오단. [사진=바이두]


영화는 무훈이 태어난 지 111주년을 기념한 1949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산둥성 무훈의 사당 앞에서 학생들에게 무훈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선생님의 모습이 그려진다. 무훈의 이야기는 영화 속 영화로 액자화돼 펼쳐진다.

러닝 타임이 208분이나 되는 대작이다. 영화의 끝에 이르러 이야기를 마친 선생님은 무훈의 공로와 한계를 언급하며 스스로 영화의 평론가 역할을 한다. 가난한 자의 반봉건적 투쟁은 용감한 것이었지만, 개인적 저항은 한계가 분명했다는 것이다.

사실 무훈은 그 당시 ‘핫’한 아이템이었다. 1930년대 전후만 해도 무훈을 칭송하는 많은 문학 작품이 출간됐다. 또 그의 이름을 따온 학교가 적잖이 세워지기도 했다. 어려운 상황에 굴하지 않고 ‘교육’의 가치를 위해 헌신했던 그의 일생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특히 타오싱즈(陶行知) 같은 근대 교육 운동가는 무훈의 공로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랬기 때문에 영화 ‘무훈전’도 상영 초기에는 크게 환영을 받았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주더(朱德) 총사령관, 저명 작가이자 학자인 궈모뤄(郭沫若) 등은 다들 영웅적인 무훈의 모습에 찬사를 보냈다. 정계와 군계, 학계, 문학계 등에서 많은 긍정적 평가가 잇달았다.
 

마오쩌둥이 ‘무훈전’을 비판한 1951년 인민일보의 사설. [사진=바이두]


그러나 사건은 1951년 5월 20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로부터 시작됐다. 느닷없이 ‘영화 무훈전에 대한 토론을 중지해야만 한다’는 사설이 실렸다. 사설은 나흘 전 먼저 발표된 공산당 중앙선전부 부부장 저우양(周揚)의 비판적 칼럼을 뒤이은 것이었다.

사실 상영 당시에서 찬반양론이 있었기 때문에 저우양의 입장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저우양의 직책이 중앙선전부 부부장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공산당 중앙선전부는 전국적인 이데올로기 기획과 선전을 수행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사설은 “이러한 칭송을 인정하고 용인하는 것은 농민 혁명 투쟁에 대한 모독을, 중국 역사에 대한 모독을, 중국 민족을 모독하는 반동 선전을 인정하고 용인하는 것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심상치 않은 조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사설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수정을 거쳐 게재된 것이었다. 비판의 창 끝은 타오싱즈에게 향했다. 뒤이어 지식인에 대한 대규모 ‘사상 개조’를 외치기 시작했다. 두 달 뒤에는 ‘무훈 역사 조사기’라는 긴 글이 다시 ‘인민일보’에 게재되면서 영화 ‘무훈전’은 전국적 비판의 불길에 휩싸이게 됐다.

영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쑨위는 사전에 자기 검열을 수행한 것 아닌가 할 정도로 극도의 섬세한 연출을 시도한다. 시작과 끝을 담당하는 선생님의 역할은 그저 영화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무훈에 대한 그의 설명은 사회주의 중국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까지 이른다.

한편 무훈은 자신이 세운 의숙 학생들을 불러 모아 놓고 “너희는 농민이다”, “너희가 가난한 사람이란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글을 배우더라도 너희가 농민 출신이고, 빈농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는 말을 지나칠 정도로 반복한다. 영화는 지주를 뒤엎은 빈농 혁명으로 만들어진 사회주의 중국의 정통성을 처절하리만큼 옹호한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은 이 영화가 봉건주의에 물들어 있다고 비판했다. 무훈이 구걸을 하면서 봉건 통치자들에게까지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조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무훈의 공을 높이 사 황제가 내린 황포 마고자를 받지 않고 그 앞에 무릎조차 꿇지 않는 무훈의 모습이 강조된다. 그렇기 때문에 ‘무훈전’ 비판은 영화에 대한 편견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특정한 영화에 대한 긍정과 부정은 언제든 토론의 장을 형성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중국에서 예외 없는 ‘무훈전’ 비판 광풍은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하기 위한 마오쩌둥의 욕심에서 비롯됐다.

영화를 구실로 삼아 말 많은 지식인들을 일거에 숙청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혁명에는 성공했으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감독 쑨위는 운 좋게 90세까지 살았지만, 비판 운동 뒤에는 겨우 2편의 영화를 더 만들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 때는 ‘무훈전’을 구실로 온갖 비판과 박해에 시달려야 했다. ‘무훈전’은 완전히 금기어로 자리 잡았고 그 뒤로 누구도 영화를 볼 수 없었다. 영화는 그렇게 사회주의 중국 최초의 금지 필름이라는 ‘영예’를 안게 됐다.

‘무훈전’은 개혁·개방 이후에야 복권됐다.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성찰을 주도했던 후차오무(胡喬木) 중앙정치국 위원은 1985년 인민일보에 무훈전 비판이 “매우 편협하고 극단적이었으며 거칠었다”는 글을 발표했다.

그 뒤 상하이에서의 공개 상영을 거쳐 2005년, 55년 만에야 관객들과 다시 만날 수 있게 됐다.
 

[임대근 교수의 차이나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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