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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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8-03-0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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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김가전 전라북도 지사와의 인연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은 전라북도 도지사 김가전(金嘉全)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따랐다. 김가전 선생은 1892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다. 김가전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학교의 교목(校牧)으로 부임해 학생들에게 신앙과 민족정신을 일깨운 성직자이기도 했다.

김가전의 형인 김인전(金仁全) 선생도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 의장을 역임했던 독립운동의 거물이었다. 지금의 국회의장 격이다. 두 형제는 3·1운동에 참가하여 옥고(獄苦)를 치렀던 독립투사였다. 김가전은 7개월간의 감옥 생활 후 전주 신흥학교에서 인재들을 양성하다가 8·15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김가전 선생은 전주북중 교장을 맡아 또 다시 육영사업에 힘썼다. 그러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김가전 선생에게 공직에 나설 것을 여러 차례 권유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사양했으나, 끝내 이승만 대통령의 권유를 저버리지 못하고 1949년 12월 15일 제3대 전라북도 도지사에 취임하게 됐다. 도지사 취임 후에도 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김가전 전북대학교 창립에 앞장섰다.

차일혁이 김가전 지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제18전투경찰대대를 맡게 되면서부터이다. 1950년 12월 10일 김가전 지사는 제18전투경찰대대장에 보임된 차일혁에게 내무부장관을 대신하여 경감(警監) 임명장을 수여했다. 그 자리에서 김가전 지사는 온화한 목소리를 담아 “차(車) 대장의 명성은 옛날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소. 차 대장의 실력을 믿겠소.”라며 격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김의택(金義澤) 도경국장과 전북지구전투사령관 최석용(崔錫鏞) 대령도 자리를 함께 하며 차일혁을 축하해 줬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김가전 지사는 차일혁이 지휘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 창설식에도 참석해 자리를 빛내줬다. 그때가 1950년 12월 15일이었다. 당시 제18전투경찰대대로서는 모든 것이 미흡할 때였다. 하지만 김가전 지사는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창설되는 제18전투경찰대대와 지휘관으로 취임한 차일혁을 마음껏 축하해줬다. 이때부터 김가전 지사는 성질이 급한 차일혁을 때로는 제자처럼, 때로는 아들처럼 대하며 감싸줬다. 김가전은 1892년생으로 1920년생인 차일혁과는 나이 차이가 무려 28년이나 났다.

이때 차일혁은 김가전 지사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빨치산 토벌을 책임진 전투경찰대 대대장에 취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출사표(出師表)를 부하들에게 똑똑히 밝혔다. 출사표는 대원들에 대한 앞으로 전투에 임할 마음자세에 대한 주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전투를 지휘하게 될 차일혁 자신에 대한 각오이기도 했다.

“여러분들은 이제 늠름한 전투경찰대원으로서 조국을 지키는 데 혼신을 다해주기 바란다. 전투경찰은 더 이상 도피처도 아니며 공비들에게 희롱당하는 약한 부대도 아니다. 우리는 절대, 공비들과 전투하는데 있어서 물러 설 수 없다. 여러분들이 후퇴한다면 내가 총을 쏠 것이고, 내가 후퇴를 하려 한다면 제군(諸君)들이 나에게 총을 쏴도 좋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각오로 이 땅에서 공비(共匪)들이 사라지는 날까지 용감히 싸우자.’

김가전 지사는 차일혁 부대에 대해 남달리 애정을 갖고 대했다. 김가전은 차일혁 부대의 행사에는 거의 모두 참석하디시피 했다. 제18전투경찰대대가 첫 출정할 때부터 김가전 지사는 참석해 격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김가전 지사는 1950년 12월 26일 전북 도청 앞에서 거행된 출정식에서 훈시를 하며, 제18전투경찰대대의 무운장구를 빌어줬다. 이후에도 김가전 지사는 김의택 도경국장과 함께 차일혁 부대가 출정하는 날이면 만사를 제쳐두고 참석하여 격려해 줬다. 대단한 정성이 아닐 수 없었다.

김가전 지사는 차일혁을 전투지휘관으로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차일혁 부대가 출정하여 복귀하면 누구보다 환대해 줬다. 거기에는 차일혁 부대가 높은 전공을 세우는 것도 크게 한몫했다. 김가전 지사 입장에서는 차일혁부대가 늘 자랑스러웠다. 그런 까닭으로 기회가 닿으면 차일혁의 전공을 치하했다. 1951년 5월 2일 전북 도경에서 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는 지난 3월 중순부터 한 달 동안의 ‘공비토벌 종합보고’가 있는 날이었다.

전공부대에 대한 표창수여식이 함께 있었다. 내무부장관, 국방부장관, 치안국장이 수여하는 표창장 수여가 있었다. 전라북도가 같은 기간 중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실적을 거두어 표창을 받게 된 것이다. 빨치산토벌에 공로가 컸던 임실·고창·순창· 무주 경찰서장과 서원들이 표창장과 포상을 받았다. 차일혁의 제18전투경찰대대는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김 지사는 전북이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되자 기분이 좋았다. 표창식 수여식과 김가전 지사의 격려사가 끝난 다음 예정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 김가전 지사가 차일혁에게 빨치산토벌에서 느낀 점을 발표해 보라는 것이었다. 김 지사의 의중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던 차일혁은 비록 예정에 없던 일이라 다소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았다. 차일혁은 차분하게 작전 중 느낀 점들을 하나씩 털어 놓았다.

그 자리에서 차일혁은 “주민들의 안정된 생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투항하는 빨치산들에게도 관용을 베풀 것”을 요구했다. 차일혁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그 자리에는 미 고문관을 비롯하여 지방 기관장들이 모두 참석한 자리였다. 김가전 지사도 차일혁의 말에 적극 동감했다. 김 지사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차일혁으로 하여금 대신 하게 했던 것이다. 차일혁은 그런 김 지사의 의도를 알아채고 그렇게 말을 했다.

그런 김가전 지사가 1951년 10월 6일 갑자기 사망했다. 향년(享年) 59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그때 차일혁은 전북 장수와 진안 지역빨치산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진안 덕태산 지역을 정찰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관계로 하루 늦게 김 지사의 급서(急逝) 소식을 들었다. 차일혁은 김 지사의 비보(悲報)를 듣고 이내 슬픔에 잠겼다. 차일혁은 전투를 앞두고 있어 영결식에 갈 수 없었다. 차일혁은 김근수 경위를 대신 보내 조의를 표하게 했다. 김가전 지사의 영결식에 참석했던 김근수 경위는 낯익은 청년 하나를 데리고 왔다. 김가전 지사가 평소에 총애하던 수행원 유도수였다.

그 당시 유도수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망한 축구선수였다. 김가전 지사가 전주북중 교장으로 있을 때 전주북중이 전구 축구대회에서 우승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던 뛰어난 선수였다. 그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시험을 볼 때는 답안지 뒤에다 축구공만 그려 넣고 나왔다. 그러나 축구만은 신기(神技)에 가까울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유도수는 김가전 지사를 모시기 전에는 전북도경에 근무했다. 그러다 김가전 지사를 모시기 위해 사표를 내고 전북도청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김가전 지사가 죽고 나자 차일혁 대신 조문하러 갔던 김근수 경위가 유도수를 데리고 왔다. 차일혁은 유도수를 최순경(崔順庚)과 함께 보신병(保身兵)으로 임명했다. 한 달 이상 무주에 머무르면서 구천동 작전 등 크고 작은 작전을 수행했던 차일혁 부대가 10월 27일 전주로 돌아왔다. 차일혁은 구천동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철주부대장을 사직하기로 결심했다. 단지 전투에서의 패배 때문이 아니었다. 차일혁이 존경했던 김의택 전임 도경국장이 다른 곳으로 전출해 갔고, 또 자신을 그 누구보다 이해하며 아껴줬던 김가전 지사의 죽음으로 마음이 매우 울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일혁은 윤명운(尹明運) 전북도경 국장에게 그동안의 전투경과에 대해 보고하고 나서 사표를 제출했다. “본인의 미숙한 작전으로 많은 대원들을 희생시켰습니다.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습니다.” 그러자 윤 도경국장은 “무슨 소리요? 물론 구천동 작전에서 차(車) 대장이 처음으로 패배를 해서 많은 희생을 당했지만 그래도 6지대를 섬멸하는 등의 성과도 있지 않소? 차 대장답지 않게 무슨 그리 약한 소리요?”하며 말렸다.

하지만 차일혁은 “저는 더 이상 경찰에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는 경찰이 어울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국장실을 나왔다. 그리고서 차일혁은 완산동에 있는 김가전 지사의 묘소를 찾아갔다. 차일혁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동안의 작전 경과와 함께 자신의 착잡한 심정을 내비췄다. 김 지사 생전에 그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보신병 최순경도 슬픔에 잠겨 눈물을 훔쳤다.

평생을 독립운동가로, 교육자로, 행정 관료로 살았던 김가전 지사는 이제 떠나고 없었다. 차일혁을 유독 자식처럼 아끼며 보살펴줬던 김 지사였다. 차일혁도 그런 김 지사를 마치 아버지를 대하듯 공손하게 따르며 가르침을 받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김 지사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으니 차일혁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차일혁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김 지사의 묘소를 찾아뵙고 위로를 받곤 했다. 차일혁은 한 번 맺은 인연에 대해서는 평생을 두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따뜻한 사나이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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