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89] 준가르 제국은 어떻게 사라지나?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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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3-09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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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황혼 맞은 유목 기마군단

[사진 = 만리장성 대포]

청나라와 갈단의 대결은 두 세력의 대결에서 청나라가 승리했다는 것 이상의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이 두 세력의 대결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화기(火器)가 대거 등장했다는 점이다. 명나라와의 싸움에서도 포르투갈이 만든 대포 등을 사용했던 청나라는 갈단과의 싸움에서도 대포와 소총을 대거 등장 시켜 과거의 전투 형태에서 벗어나는 모양을 보여주었다.

물론 갈단 측에서도 대포 등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화력에 있어 청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 것은 곧 유라시아 지역에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해 지역의 정세를 뒤바꾸어 놓았던 유목 기마군단이 새로운 상황을 맞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군사력 측면에 있어 기마군단은 이미 황혼을 맞고 있었다는 것을 얘기해 주고 있다.

▶ 청, 할하 지배권 확실히 장악

[사진 = 나담 축제장의 몽골인]

어째든 갈단의 죽음으로 청나라는 할하에 대한 확실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청나라의 관리가 할하 지역에 파견됐고 청나라의 군대까지 일부 지역에 주둔했다. 몽골의 여러 부족은 만주족의 팔기제도에 따라 편성됐다. 당시까지 강희제는 몽골인의 생활에 대해서는 깊게 관여하지는 않았다.

할하의 땅을 보호령으로 확보한 강희제는 갈단이 죽은 상황에서 굳이 준가르 지역을 정복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셍게의 아들이자 갈단의 조카인 체왕 랍탄이 준가르의 지도자로 떠오르는 것도 방관했다. 갈단을 처치하는데 청나라와 손을 잡았던 체왕 랍탄도 청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다.

동쪽의 안전을 확보해 두어야 적어도 준가르 지역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본 것이다.

▶ 서쪽으로 정복사업 계속한 준가르

[사진 = 카자흐 초원지역]

실제로 그는 준가르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면서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정복 사업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갈단이 공격했던 카자흐와 키르기즈 지역을 다시 공격했다. 과거 갈단이 그 지역을 장악하기는 했지만 그 지역을 지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다시 공격에 나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청나라와 준가르 사이에 20년 가까이 평화의 상태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도 준가르가 티베트의 정세에 개입하고 나서면서 다시 대결의 양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 티베트 문제 둘러싸고 다시 대립

[사진 = 라쌍 칸]

이제 마지막 유목 제국 준가르이 어떻게 멸망하는지 그 과정을 간추려 보자. 준가르와 청의 평화로운 관계는 티베트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이해가 엇갈리면서 끝이 났다. 강희제는 당시 호쇼트부의 라쌍 칸을 부추겨 티베트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섭정 상게 갸쵸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 공격에서 라쌍 칸은 상게 갸쵸를 죽이고 달라이 라마 6세를 폐위시켰다.
 

[사진 = 달라이 라마 6세(창잉가쵸)]

이 달라이 라마 6세는 달라이 라마 5세가 죽은 지 15년 만에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생으로 지목된 인물이었다. 그가 창잉갸쵸다. 강희제는 라쌍 칸에게 달라이 라마 6세를 북경으로 소환하도록 요구했다. 티베트 군중의 반대 속에 체포돼 북경으로 가던 달라이 라마 6세는 청해 근처의 호반에서 24살의 젊은 나이로 숨졌다. 청조와 라쌍 칸은 판첸라마 2세의 동의를 얻어 새로 달라이 라마 6세를 세웠다. 

하지만 티베트인 누구도 그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호쇼트부 인사들은 1,708년 동 티베트에서 태어난 유아를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지목해 강희제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그가 나중에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달라이 라마 7세로 승인된 겔상갸초다.

▶ 준가르의 티베트 장악

[사진 = 준가르 정벌도]

준가르의 체왕 랍탄은 티베트의 이러한 상황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었다. 준가르에 강한 영향을 미치는 티베트 불교가 청나라에게 이용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티베트인과 호쇼트부의 반감을 이용해 티베트를 장악하려는 원정 계획을 세웠다. 1,717년 체왕 랍탄은 동생이 지휘하는 군대를 티베트로 보냈다.

호쇼트인과 티베트인의 지원 속에 무인지경으로 라싸까지 도달한 6천 명의 준가르군은 쉽게 라싸를 장악했다. 그도 그럴 것이 티베트인들이 성문을 열고 환영을 했기 때문에 준가르군은 거의 저항이 없이 성에 들어설 수 있었다. 포탈라궁을 나와 준가르군에게 저항하던 라쌍 칸은 그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 이후 준가르군은 청나라를 추종하는 세력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라싸를 약탈했다.
 

[사진 = 티베트 불교 승려]

실제로는 그 기회에 황교를 제외한 나머지 종파의 승려는 거의 죽이거나 추방하고 사원들을 약탈 파괴했다. 그러한 과격한 행동을 본 티베트인들은 오히려 준가르군에게 적대감을 갖게 됐다.

▶ 청의 티베트 보호 시작

[사진 = 달라이 라마 7세(겔상갸초)]

라쌍 칸이 청나라에 보낸 구원요청 서한은 그가 죽은 지 3개월 후에 북경에 도착했다. 강희제는 준가르가 티베트를 차지하도록 그냥 버려 둘 수 없었다.
청나라는 즉시 7천의 병력으로 라싸로 향했지만 중간에 준가르군에게 패해 거의 전멸했다. 1,720년, 청나라는 보호하고 있던 유아 겔상갸쵸를 달라이 라마 7세로 승인한 뒤 다시 준가르 공격에 나섰다.

티베트인의 반발에다 청군까지 밀려오자 준가르군은 라싸 북쪽 지역으로 달아났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 7세는 청나라 병사의 호위아래 티베트인의 환호를 받으며 라싸에 입성했다.
 

[사진 = 옹정제]

그래서 달라이 라마 7세가 포탈라 궁에서 즉위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사실상 청나라의 티베트 보호가 시작된 것이다. 1,722년 강희제가 죽고 옹정제가 즉위하면서 티베트에 주둔하던 청군이 물자부족으로 잠시 철수했으나 이듬해 다시 호쇼트부의 내란을 구실로 청해 지방과 티베트를 완전 장악했다.

이후 청나라는 티베트에서도 몽골의 할하지역과 마찬가지로 팔기제도에 근거를 둔 기제(旗制)를 실시함으로써 티베트를 세력권 안에 편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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