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86] 갈단과 강희제 대결의 끝은?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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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3-06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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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3군단 형식 몽골 원정

[사진 = 강희제]

1,696년 4월, 몽골고원으로 떠난 강희제의 청군은 모두 10만 7천명이었다. 강희제는 이 대군을 삼 군단으로 나눴다. 동로군(東路軍)과 서로군(西路軍) 그리고 중로군(中路軍) 등 3개 군단은 각각 3만 5천명에서 3만 7천명사이의 병사로 구성됐다. 동로군은 만주의 심양에서 출발해 동쪽에서 케룰렌강 쪽으로 향했다.
 

[사진 = 툴강]

서로군은 내몽골 서부에서 음산산맥과 고비사막 서쪽을 지나 툴강 쪽으로 접근한 뒤 갈단의 본영이 있는 케룰렌강 상류의 바얀 우란을 서쪽에서 공격하면서 퇴로를 차단할 예정이었다.
 

[사진 = 고비사막]

강희제가 직접 지휘한 부대는 중로군 3만 7천명이었다. 북경을 출발한 중로군은 돌룬노르를 거쳐 고비사막 한 가운데를 관통한 뒤 곧장 바얀 우란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몽골 전통의 3군단 형식의 공격 전략을 이번에는 청나라가 선택한 것이다.

▶ 차질 빚은 공격 전략
하지만 동로군이 바얀 우란지역에 합류하는 시점이 늦어져 강희제는 일단 동로군을 할하강 지역에 머물도록 했다. 그래서 서로군과 중로군으로 갈단을 상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작전은 처음부터 차질이 빚어졌던 것이다.

[사진 = 강희제 행차]

일부에서 회군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강희제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강희제가 이끈 중로군의 행군은 순조로워 갈단의 진영과 5일 정도 거리를 남겨뒀을 때 서로군으로부터 눈과 비 때문이 행군이 늦어져 예정된 날짜에 도착할 수 없다는 연락이 왔다.

비록 5월이라고는 하지만 몽골은 아직 봄이 제대로 찾아오지 않은 시기라 눈이 내리기 일쑤였다. 할 수 없이 강희제는 진군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 이미 도주한 갈단의 군대

[사진 = 갈단과 강희제 전투]

서로군으로부터 갈단의 진영에 도착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고 강희제의 중로군은 전투대형을 갖춘 채 갈단의 진영으로 밀고 들어갔다. 이때가 6월 6일로 북경을 떠난 지 두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하지만 갈단의 진영으로부터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이미 갈단의 군대는 청나라 군대를 피해 현장을 떠난 뒤였기 때문이었다. 각종 의상과 불상, 먹다 남은 음식 등 급하게 현장을 떠난 흔적만 남았을 뿐 준가르 병사들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신 주변의 할하인들이 달려와 강희제가 친정에 나선 것을 찬양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 유목민 군대, 강한 적 만나면 도주
유목민 군대에게 강한 적을 만나면 도망가는 것은 수치가 아닌 정당한 전술이었다. 갈단은 내몽골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싸운 것은 적의 강한 곳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어렵게 했다는 점에서 이내 후회했다. 그래서 청나라와 대결하는 전략을 다시 세웠다. 먼저 적의 진영을 공격해 들어가지 않고 적을 초원으로 유인해 유리한 국면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목민들에게 인심을 얻어가면서 기회가 오면 적을 격멸시켜 큰 뜻을 이루는 방법이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소수의 병력과 마주치면 싸우고 다수와 마주치면 후퇴하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다가 청군이 퇴각하면 후미를 공격해 물고 늘어진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오래 동안 괴롭히다 보면 청군은 식량이 떨어지고 사기도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승기(勝機)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청나라 황제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친정에 나설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청나라 황제가 자신의 군대보다 몇 배나 되는 병력을 이끌고 사람도 다니지 않는 사막을 건너 초원까지 밀려온 상황이라 갈단은 일단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마음이 급해진 갈단은 물건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도주 길에 올랐다. 강한 적을 피해 서둘러 달아나는 원래의 전략을 택했던 것이다.

▶ 철군 길에 오른 강희제

[사진 = 몽골 동부 초원의 말떼]

강희제는 갈단군이 초원 속으로 사라지고 없는 상황이 난감했다. 지금까지는 일정한 목표지점을 두고 진군을 계속했지만 어디로 달아난 지도 알 수 없는 갈단군을 쫓아 방향도 잡기 어려운 초원을 헤매고 다니는 일에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더욱 곤란한 것은 각 병사에게 휴대시킨 80일분의 식량이 거의 바닥나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계속 갈단의 군대를 찾아 나서는 것도 위험하지만 철군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현지에 도착해 갈단군의 서쪽 퇴로를 차단하기로 한 서로군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강희제는 할 수 없이 소수의 정예부대를 편성한 뒤 20일치의 식량을 주어 갈단을 계속 추격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전진기지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갈단군을 포착해 그들을 격파하려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그런 만큼 적의 모습조차 포착하지도 못한 채 말머리를 돌려야 하는 강희제의 실망감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 원정 중 황태자에게 보낸 편지

[사진 = 황태자 윤잉]

강희제는 몽골 원정의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북경에 있는 황태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강희제는 35명의 아들과 20명의 딸을 두었다. 그 가운데 황태자인 둘째아들 윤잉(胤礽)만 황후의 소생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강희제는 이 아들을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했다. 윤잉은 강희제가 몽골 친정을 떠난 뒤 북경에 남아서 정무를 대신하고 있었다.
 

[사진 = 강희제의 만주어 편지(대만 고궁박물관)]

세 차례의 몽골 원정 기간 중에 강희제는 만주어로 쓴 87통의 애정 어린 편지를 아들에게 보냈다. 당시 강희제가 보낸 편지는 대만 고궁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강희제는 그 편지를 통해 아버지로서 또 군주로서 후계자 교육을 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몽골 원정 중에 일어난 상황은 물론 몽골의 지형과 식물 등을 설명하는 자상한 글을 보냈다.
 

[사진 = 초원의 양떼]

어떤 경우에는 몽골 초원에서 채집한 식물을 북경으로 보내기도 했다. 강희제는 후궁에게도 “이곳 특산 참외를 얻었소. 맛이 제법 뛰어나기에 인편에 보내오.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먼 곳에서 보내니 비웃지 말기를 바라오.” 라는 편지와 함께 참외를 보냈다.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가 상황이 긴박한 전쟁터에서 후궁인 여인을 떠올리는 자상하고 감성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인간적인 면이 강희제를 오랫동안 어려운 황제자리를 지켜가도록 만든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갈단과 강희제의 대결에서 갈단 측의 움직임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반면 청나라 측 움직임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상세히 남아 있는 것도 강희제가 남긴 기록이 워낙 많기 때문일 것이다.

▶ 철수 길에 오른 실망감 배인 편지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강희제가 황태자에게 보낸 편지 속에 당시의 심정이 나타나 있다.

"군대를 이끌고 전진하는 순간에는 완전히 한마음으로 혼란함이 없었다. 이제 군대를 뽑아 달아난 갈단을 뒤쫓게 했다. 이제 귀로에 오르니 견딜 수 없게 네가 보고 싶구나.

날씨가 더워졌으니 네가 입는 면사 면포의 긴 옷 네 벌과 상의 네 벌을 반드시 입던 것으로 보내라. 아버지가 너를 보고 싶을 때 입고 싶구나. 내가 있는 이곳에는 양고기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지난번 보내준 송화강 송어는 기쁘게 먹었다. 살찐 거위와 닭, 돼지, 새끼돼지를 3대의 수레에 실어 상도의 목장으로 가져오게 해라. 내가 전진(前進)을 하는 것이라면 결코 이런 주문을 할 리가 없다.

갈단의 움직임을 보면 아무래도 멈출 것 같지 않구나. 단지 서로군이 바로 오면 갈단은 거기서 끝장 날 것이다. 만일 빠져 나간다 해도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하늘아래 땅위에서 할하의 땅과 같은 곳은 없다. 풀이 있는 장소보다 좋은 곳은 만에 하나 천에 하나 있을 수 없다."

▶ 황태자 폐위 아픔 겪는 강희제
갈단을 잡지 못하고 귀로에 오른 실망감이 편지 속에 배여 있다. 드넓은 초원에 대한 애정도 엿보인다. 이와 함께 아들에 대한 따듯한 사랑 역시 편지 속에서 묻어나고 있다. 하지만 강희제는 나중에 방종한 생활에 물들었다는 이유 등으로 황태자인 아들을 두 번이나 폐위시키는 아픔을 맛보게 된다. 아들을 폐위시킨 강희제는 슬픔으로 며칠 간 잠을 자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진 = 옹정제]

그래서 복잡한 과정을 거쳐 새로 황태자가 된 넷째 아들이 바로 옹정제다. 아무튼 이 편지 속에서 예측한 대로 서로군이 나타나면서 갈단은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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