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착각錯覺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02-26 06:00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요가수트라 1.8

[사진=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로빈 레인 폭스
오래전 이야기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고전학 교수 로빈 레인 폭스(Robin Lane Fox·72)를 서울대로 초청해 특강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폭스 교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세계의 위인들에 대한 평전 저자로 유명하다. 그가 30살 때 쓴 ‘알렉산더 대왕’이란 책은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을 감동시켜 ‘알렉산더 대왕’이란 영화로 재탄생했었다. 2016년 저술한 ‘어거스틴: 회심에서 고백으로’는 서양 그리스도교 교리의 근간을 마련한 어거스틴에 대한 고전이다. 나는 화창한 4월 연구실에서 그를 맞이했다. 해리포터 안경을 쓴 그는 키가 컸고 건강해 보였다. 내가 생각한 서양고전학자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에게선 평생 운동을 해온 영국 귀족의 기품이 풍겼다.

폭스 교수와 나는 제법 멀리 떨어진 강의실로 가기 위해 연구실에서 나와 15분 정도 걸어야 했다. 4월 관악산엔 꽃이 만발하고 꽃잎들이 흩날려 우리의 짧은 산책을 즐겁게 만들었다. 나는 그에게 서울대 관악교정이 산 중턱에 있어 공기도 좋고 나무도 많다고 허접하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는 강의실로 가는 내내 우리가 지나친 나무들의 라틴어 학명을 정확하게 말하면서 설명해주었다. 나는 10년 이상 지나친 나무들을 그저 ‘나무’로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나무는 하나도 없다. 폭스는 ‘나무’라고 알고 있던 그 식물들에게 이름을 하나하나 붙이면서, 그 나무들에게 존재감을 심어주었다. 개별나무들이 이제 자신의 이름을 가진 특별한 존재가 된 순간이다. 세상에 그저 ‘나무’인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란 개념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고전학 교수가 아닙니까? 식물에 대해서, 아니 관악산에 심긴 나무와 꽃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는 웃으며 대답한다. “왜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가? 고전학 교수는 도서관 안에서 먼지 나는 그리스 파피루스만 뒤져야 하는가?” 내가 가진 '옥스퍼드대 고전학 교수'에 대한 이미지는 허상이었다. 그런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두꺼운 안경을 끼고 꾸부정하여 도서관에서 남들이 전혀 보지 않을 오래된 책을 보는 사람을 기대했다. 움베르코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도서관 수사와 같은 인상을 상상했었다.
 
폭스는 아직도 파이낸셜 타임스에 일주일에 한 번씩 원예칼럼을 쓴다. 그는 ‘더 좋은 정원 가꾸기’(1982)와 ‘정원의 다양한 식물들’(1986)라는 책을 저술한 원예전문가였다. 2010년엔 ‘사려 깊은 정원 가꾸기: 위대한 식물들, 위대한 정원들, 위대한 정원사들’이란 책을 출간했다. 말 타는 솜씨는 거의 승마선수 수준이라 올리버 스톤의 영화 ‘알렉산더 대왕’에 말을 타는 마케도니아 대장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나는 폭스를 착각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에 몰입하는 학자다. 내가 그를 고전학자라고만 생각한다면 실수다. 나는 지난 16년 동안 보고 느끼고 향기를 맡는 내 연구실 근처 나무들과 꽃들을 안다고 착각했다. 오히려 서울대 교정을 딱 한번 방문한 그가 관악산 식물들을 더 많이 알고 있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내가 잘 알고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분야를 나는 정말 알고 있는가?
 
개념(槪念)
폭스는 알고 있지만 나는 알지 못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와 나는 관악교정에 있는 똑같은 나무와 꽃을 관찰하지만 그는 ‘알고’ 나는 ‘알지 못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자신이 관찰하는 대상을 자신의 마음속에 안착시키기 위해 그 대상이 안주할 수 있는 범주를 구축했다. 그는 그 대상에 속할 만한 범주를 떠올려 그 안에 안착시킨다. 그런 후 그 범주 안에 속한 다른 개별적인 대상들과의 공통점·차이점을 추론한다. 이 과정을 통해 마음속에 그 대상만이 지니는 유일무이한 개별 범주가 생긴다. 이 독특한 범주가 개념(槪念)이며, 이 범주를 마련하는 과정이 공부(工夫)다.
 
'개념'이란 영어단어 ‘콘셉션’(conception)을 살펴보면, 그 의미가 확인히 드러난다. ‘콘셉션’은 ‘-와 함께’란 의미를 지닌 접두어 ‘콘’(con)과 ‘장악하다; 포획하다’란 의미를 지닌 동사 ‘카페레’(capere)의 합성어다. 콘셉션 어원의 의미를 살려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유사한 의미를 지닌 다양한 생각의 조각들이 하나의 범주로 포획된 추상적인 생각.’

공부란 세상을 해석하는 다양한 개념들을 가지는 수련이다. 만일 내가 마당에 있는 나무를 쳐다 보기만 하고 그 나무가 속한 범주를 알지 못한다면, 나는 그 나무를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개념’은 자신이 독자적인 의미를 지닌 생각으로 발전하기 위한 정신적인 ‘태아’(胎兒)다. 실제로 ‘콘셉투스’(conceptus)라는 단어는 임신 기간 동안 주변의 다른 세포조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라나는 ‘태아’를 의미한다.
 
내가 어떤 대상을 응시할 때 그 대상의 범주를 모른다면, 내가 아는 것이 아니다. 혹은 그 대상에 속한 범주를 공부한 적이 없어, 내 마음속에 그 범주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가 지니고 있는 유사한 범주에 강제로 진입시킬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경험했다 하더라도 건성으로 이해한 어떤 사실을 자신이 오랫동안 간직해온 범주 안에 강제로 진입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좌우 이데올로기에 안주하는 정치가들이나 종교근본주의자들이 대개 그렇다. 이들이 세상을 보는 눈은 딱 두 가지다. 나와 너, 선와 악, 백과 흑, 남과 북, 남과 여, 노인과 젊은이, 천당과 지옥, 원인과 결과, 그리고 내편과 네편이다.

그들은 자신의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선 현상을 자신의 편견 속으로 강제 진입시킨다. 그 현상에 지닌 고유한 위치를 말살하고, 자신의 이분법적인 무식을 강화하려고만 한다. 이 강제 진입이 착각(錯覺)이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고전학 교수 로빈 레인 폭스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지식(知識)
자신이 오감으로 감지하는 외부를 있는 그대로 보는 실력인 통찰(洞察)은 그 외부를 인식할 수 있는 범주인 ‘지식’을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지식이란 무엇인가? 내가 어떤 사실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앎은 동물을 인간답게 만드는 유일한 가치다. 인간은 앎을 통해, 동물에서 신적인 존재로 변화한다.

서양인들은 ‘앎’을 대표적인 단어 두 가지로 표현했다. 먼저 중동지방에 역사 이전 시대부터 살고 있었던 셈족인들은 ‘앎’을 *야다아(yada‘a)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안다’라는 의미를 지닌 이 단어는 정신적인 활동만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다. ‘야다아’는 시행착오를 동반한 수많은 행동을 통해 어떤 것을 깊이 아는 지혜다. 셈족어 ‘야다아’는 우리가 보기에는 상반되는 의미들을 모두 포함한다. ‘야다아’의 첫 번째 의미는 ‘경험하다; 섹스하다’이다. ‘창세기’ 4장은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았다’라고 시작한다. 이 문장에서 ‘동침하다; 성관계를 맺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다아’에서 파생한 ‘야다’(yāda)이다.

두 번째 의미는 ‘어떤 대상을 깊이 알다’이다. ‘잠언’ 1장7절에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 문장에서 ‘야다아’의 명사형인 ‘다아쓰’가 ‘지식’이란 의미로 사용됐다. 우주 삼라만상을 처음 보는 것처럼, 두려운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 배움의 시작이다. 셈족어에서 지식은 ‘경험’을 통해 서서히 생기는 삶에 대한 분명한 이해다.
 
인도-유럽인들은 지식이란 개념을 ‘그네흐’(*ǵneh₃)라고 표현하였다. ‘그네흐’라는 어근의 가장 큰 특징은 어떤 대상을 인식하고 알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운전할 줄 안다’는 운전을 해본 경험이 있어 실제로 운전대를 잡았을 때, 그 기억을 되살려 차를 제대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혹은 ‘나는 아랍어로 기록된 쿠란을 안다’라는 문장은 내가 수년동안 아랍어를 배워, 그것을 바탕으로 쿠란 원전을 읽을수 있는 능력이 있다라는 믿음의 표시다. 이 단어의 어근인 ‘그네흐’(*ǵneh₃)가 고대 그리스로 들어와 ‘그노시스’(gnosis)로, 게르만어군에서는 ‘안다’라는 의미로 영어 ‘노우’(know), 독일어 ‘켄넨’(kennen)이 됐다. ‘그네흐’(*ǵneh₃)가 인도로 들어와 ‘즈나’(jñā)가 되었다. 산스크리트어 ‘즈나’는 ‘알다; 인식하다; 이해하다’라는 의미다.
 
착각(錯覺)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6에서 인간의 생각을 다섯으로 나누었다. 그 생각들 중 첫 두 가지는 대상을 직접 경험해 생기는 생각의 유형들이다.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통찰’(프라마나)(YS I.7)이라고 부르고, 대상에 대한 부정확한 인식을 ‘착각’(비파르야야)(YS I.8)라고 부른다. 비파르야야는 어떤 대상을 보았으나, 인식의 주체인 관찰자가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고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그것이 진리라고 착각하는 생각이다. 이것이 ‘착각’이다.

파탄잘리는 ‘착각’을 ‘요가수트라’ I.8에서 다음 같이 정의한다. “비파르야요 미쓰야-즈나남-아라드루파 프라시스탐(viparyayo mithyā-jñānam-atadrūpa pratiṣṭham).” '착각은 자신의 본래 모습이 아닌 것에 뿌리를 둔 거짓된 지식이다'는 뜻이다. ‘착각’이란 산스크리트 단어 ‘비파르야야’는 부재를 의미하는 접두어 ‘비’와 수련하는 자가 반드시 가야하는 길인 ‘파르야야’의 합성어다. 착각이란 내가 갈 수 있는 더 좋은 길을 가기를 주저하고, 자신의 과거의 노예가 되어, 그 거룩한 길을 잃어버린 상태다. 나를 엄습하는 매 순간의 새로움은 ‘파르야야’로 대처할 때 새로운 길이 드러난다. 새로운 길이 보이지 않고, 그 길을 만들 생각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행위란, 진부한 과거의 길로 들어서서 구태의연한 범주 안에 지금 상황을 강제로 몰아넣는 행위다. 이것이 ‘착각’이다.
 
착각은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에 안주하는 습관이다. 파탄잘리는 이 습관을 ‘아타드루파 프라스티탐’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이 열망하는, 자신에게 감동적인 모습(루파)이 아닌 것(아타드)에 안주하는 행위(프라스티탐)에는 몰입도 없고 신명도 없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적이 없어 결국 남들이 말한 소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거짓’이란 산스크리트 단어인 mith-는 ‘소문에 의존하여 진정한 자아와 갈등을 빚는 상태’를 의미한다. 수련자가 직접 경험을 통해 얻는 지식도 아니고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를 귀 기울이지도 않을 때, 다른 사람의 말에 의존한다. 파탄잘리는 이런 행위를 ‘착각’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거짓 지식’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거짓 지식’은 ‘자신의 본래 모습에 안주하지 못하는 불안한 상태’라고 설명한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