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79] 달라이 라마의 권위는 어느 정도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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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2-24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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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티베트 국왕이 된 구시 칸
청해를 장악한 구시 칸은 오이라트의 세력을 계속 그 곳으로 불러 들였다. 그렇게 결집시킨 군사력을 바탕으로 구시 칸은 1,639년 동티베트 지역으로 진출했다. 이듬해는 운남(雲南)지역까지 포함한 동티베트지역(현재의 사천성 서부지역)를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구시 칸은 홍교는 물론이고 황교를 제외한 다른 종파, 즉 샤가파와 조낭파는 물론 티베트의 무속신앙인 ‘본포’를 따르는 무리까지 모두 제압했다. 1,641년 구시 칸은 티베트의 중앙을 거쳐 서티베트의 홍교 지원 세력 근거지까지 함락시킨 데 이어 티베트의 주요 요새를 모두 수중에 넣었다.

[사진 = 18 나한상 (승덕 보녕사 소장)]

그리고 홍교 지원자인 챵왕을 비롯한 일당을 모두 처형시키고 티베트를 통일했다. 당연히 황교인 겔룩파를 제외한 다른 종파들은 탄압 받는 상황에 처했다. 1,642년 구시 칸은 티베트의 국왕 자리에 올랐다. 그는 소남 라프덴을 실제 티베트를 다스릴 수 있는 섭정으로 임명했다. 달라이 라마 5세는 티베트 불교계의 교주로 추대됐다.

▶50년 걸려 지은 포탈라 궁

[사진 = 포탈라궁]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산에는 달라이 라마의 궁전으로 알려진 거대한 건물이 들어서 있다. 뒤로 산을 지고 90미터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이 궁전의 광장에는 지금도 이곳을 찾는 성지 순례객과 관광객들로 붐빈다.

이 궁전은 이름은 널리 알려진 포탈라 궁이다. 이 궁전은 구시 칸이 홍교를 제압하고 달라이 라마가 주도하는 황교의 권위를 확보한 뒤인 1,645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 이 궁전을 짓는 데는 무려 50년 이상이 걸려 건물은 1,696년에야 완공됐다.

그렇게 세워진 포탈라 궁은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지배를 뒷받침하는 상징물이 됐다. 달라이 라마 5세는 보살 왕 사상에 가장 충실하게 따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7세기 티베트 통일 왕조의 시조로서 티베트 불교를 들여온 송첸감보왕의 전생(轉生)이라고 내세웠다.

그래서 포탈라도 과거 송첸감보의 홍산 궁전이 들어섰던 자리에다 세웠다. 포탈라는 불전(佛典)에서 말하는 관음보살의 성지(聖地)를 말한다. 그 이름대로 이 궁전은 이후 티베트 불교의 성지가 됐다.

▶송첸감보왕의 전생 자처

[사진 = 송첸감보와 부인상(티베트 불교 창시자)]

이 궁전의 안에는 달라이 라마 5세의 초상화가 소장돼 있다. 그 초상화의 달라이 라마는 송첸감보왕과 마찬가지로 연꽃과 법륜(法輪)을 손에 들고 있다.

연꽃은 관음보살을, 법륜은 전륜성왕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이 초상화는 달라이 라마를 관음보살의 화신인 전륜성왕으로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티베트를 방문하지 못해 이 포탈라 궁을 직접 볼 수 없었던 아쉬움이 있다.
 

[사진 = 보타종승지묘(승덕)]

하지만 과거 열하(熱河)라 불리던 중국의 승덕(承德)에서 청나라의 건륭제가 포탈라 궁을 그대로 모방해 지었다는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廟)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사진 = 보타종승지묘 내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서 있는 그 곳의 꼭대기까지 가는 동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계단을 오르면서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 궁의 모습을 짐작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달라이 라마 정권 출범

[사진 = 달라이 라마 5세와 순치제(동등한 위치)]

포탈라 궁을 세워 자신의 권위를 더 높인 달라이 라마는 이념상으로 티베트의 수호신이었지만 정사(政事)는 대부분 섭정이 대신했다. 대신 구시 칸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황교의 보호자인 동시에 세속의 대주교노릇을 했다.

그래서 1,655년 죽을 때까지 그는 ‘티베트인들의 칸’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구시 칸이 죽은 데 이어 섭정까지 숨지자 달라이 라마 5세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실질적인 티베트 통치권까지 손에 넣게 된다. 구시 칸이 죽은 뒤 청해 호쇼트부에서는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사진 = 여성 타라스 프레스코화]

그러자 달라이 라마는 구시 칸의 두 아들에게 각각 다른 칭호를 주어 분할 통치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해서 호쇼트 지배자의 권력을 자연스럽게 달라이 라마 5세의 아래쪽에 놓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1,658년 구시 칸의 후계자에게 다얀 칸이라는 칭호를 주어 청해 호쇼트부를 다스리게 했다. 실질적인 통치권까지 장악한 뒤 달라이 라마 5세는 사실상 달라이 라마 정권을 출범시킨 것이다.

▶몽골에 우월적인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 5세는 이후 여러 가지 문제를 초월적인 입장에서 처리했다. 우선 몽골인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을 조정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맡았다. 또한 분쟁이 일어난 지역에서 발생한 난민을 처리하는 역할도 했다. 특히 달라이 라마는 몽골의 지도자들에게 칭호를 내려 그의 권위를 인정하는 역할을 했다.

[사진 = 5백 나한상]

달라이 라마로부터 칸의 칭호를 받은 사람은 칭기스칸 가계 출신이든 아니든 지도자로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반면 그러한 인정이 없이 칸을 자칭하는 사람은 반란자로 간주돼 응징을 받기까지 했다. 가히 달라이 라마의 권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와 함께 달라이 라마가 몽골에 대해 우월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티베트 불교와 연계된 정세 변화

[사진 = 아마르바야스갈란트 사원(몽골 두 번째 중요 사원)]

구시 칸과 함께 이후의 그를 승계한 자손들은 다얀 칸과 달라이 칸 그리고 라창 칸 등의 호칭을 받으면서 지도자의 자리를 이어갔다. 또 바가바이스의 아들로 구시 칸의 조카였던 오치르트는 어머니가 구시 칸과 재혼하면서 그의 아들이 돼 나중에 달라이 라마로부터 칸의 칭호를 받았다.

바가바이스가 아들 덕분에 사후에 칸의 호칭을 얻게 연유가 여기에 있다. 오치르트와 함께 오이라트에서는 준가르의 갈단과 토르구트의 아유기가 칸의 지위를 얻게 된다. 그런데 칸의 칭호를 갖고 있던 한사람이 죽은 후에야 차례로 칸의 지위를 얻었다는 점에서 달라이 라마가 오이라트의 칸이라는 의미로 이들에게 칸의 칭호를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도 가능하다.
 

[사진 = 티베트불교 사원 지붕의 비룡]

그렇다고 본다면 이후 몽골과 오이라트의 정세는 상당부분 티베트 불교, 특히 달라이 라마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전개돼 나간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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