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78] 호쇼트는 어떻게 티베트를 장악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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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2-23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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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티베트 불교 개종 주도한 바이바가스

[사진 = 아바로키체스바라 부처목상(세계 최대 목상부처, 110톤)]

투메트의 알탄 칸이 달라이 라마 3세와 만나 티베트 불교를 몽골로 들여온 이후 몽골에서는 급속히 티베트 불교로의 개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한 변화의 물결은 할하의 지배아래 있었던 오이라트에도 밀려왔다. 오이라트의 지도층은 대략 1,615년을 전후해 티베트 불교에 귀의했다.

17세기 초 오이라트의 주도권은 호쇼트부가 쥐고 있었다. 이 호쇼트부의 지도자 바가바이스가 티베트 불교로의 개종을 주도했다. 바가바이스는 앞서 1,623년 오이라트 연합이 알탄 칸을 제거하고 할하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 이부형제(異父兄弟), 즉 아버지가 다른 형제간에 유산 분쟁이 벌어졌다고 언급했을 때 등장했던 분쟁의 한 당사자다.
 

[사진 = 달라이 라마 5세]

당시 바가바이스는 오이라트 전체 진영에 영향력이 있었던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들이 나중에 달라이 라마 5세로부터 칸의 칭호를 받으면서 사후에 칸의 칭호를 얻게 되는 인물이다.

▶오이라트에 티베트 불교 확산

[사진 = 티베트 불교 승려(황교)]

바가바이스는 티베트 불교의 황모파(황교)인 겔룩파로 개종을 하게 된다. 그의 티베트 불교에 대한 종교적 열정은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바가바이스는 자신이 티베트 불교로 개종한 것은 물론 오이라트 다른 부족의 지도자들에게도 티베트 불교로의 귀의를 권유했다.

그래서 초로스의 하라후루(준가르 갈단의 할아버지)와 도르베트의 다라이 타이시, 토르구트의 코 오르로크(볼가르강변으로 이동하기 전)등이 티베트 불교로 개종했다. 이들 오이라트의 지도자들은 티베트 불교의 경전을 공부하도록 아들 1명씩을 티베트에 보내기도 했다.

위의 세 인물은 앞서 한 번씩 언급했던 오이라트 각 부족의 지도자들이다. 러시아 칼미크공화국의 칼미크인들이 지금도 티베트 불교를 믿고 있는 것은 그들의 조상을 이끌고 갔던 토르구트의 지도자 코 오르로크가 이때 이미 티베트 불교로 개종했던 것이 그 출발점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 구시 칸(포탈라궁 소장)]

바가바이스의 아들 오치르트 타이시 역시 아버지 못지않은 독실한 신자여서 티베트 불교 사원을 곳곳에 세우는 등 불교 전파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정작 티베트 지역을 장악하고 티베트에 달라이 라마 정권 수립에 기여한 인물은 바가바이스의 동생 구시 칸이었다. 이 구시 칸이란 인물을 기억 속에 남겨두고 당시 티베트의 정세를 살펴보자.

▶홍교 제압 노린 달라이 라마 인정
달라이 라마 3세가 내몽골 지역에서 죽은 뒤 황교인 티베트의 겔룩파 급진인물들은 몽골인인 알탄 칸의 증손자를 4대 달라이 라마로 인정했다.
 

[사진 = 게르안 티베트 불교 탱화]

이는 다분히 티베트 내부의 종파 다툼에서 몽골의 군사력을 등에 업고 다른 종파, 특히 경쟁관계에 있는 칼마파, 즉 홍모(홍교)파를 제압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던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해를 쉽게 한다는 의미에서 앞으로 겔룩파는 황교, 칼마파는 홍교로 부르도록 하겠다.

▶홍교 지원세력의 청해 장악
16세기 후반부터 청해(靑海)는 알탄 칸을 맹주로 하는 투메트가 장악하고 있었다. 실제로 황교의 강경파들은 바로 청해의 몽골인들을 티베트로 불려 들여 홍교의 유력한 지지자였던 서티베트의 챵왕을 공격하려고 했다.
 

[사진 = 티베트 라싸 ]

그렇지만 1,603년 몽골에서 티베트로 온 달라이 라마 4세는 온화한 성품을 지녔던 탓에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1,616년 달라이 라마 4세가 죽자 황교의 강경파들은 청해의 몽골 세력을 선동해 라싸를 점령했다. 그러자 홍교의 지지자였던 챵왕의 西티베트군이 출동해 전투가 벌어졌지만 몽골군을 앞세운 황교가 홍교를 제압했다.

그렇게 되자 홍교 역시 몽골에서 지지자를 끌어들여 반격에 나서게 된다. 홍교는 자신들의 지지자로 차하르부와 할하부를 연결시켰다. 대칸의 자리를 이어왔던 동쪽 차하르부의 릭단 칸은 홍교를 지원하고 나서 황교를 지원하던 투메트와 오르도스를 제압했다.

그런데 릭단 칸이 만주족의 압박을 피해 1,634년 청해로 원정하던 도중 병사(病死)했다. 릭단 칸이 죽었지만 이에 앞선 1.632년, 역시 홍교의 지지자였던 할하의 촉투 홍타이지가 청해에 도착해 투메트와 오르도스 그리고 융시에프 세력을 제압하고 청해를 장악했다.

▶호쇼트 구시칸의 청해 원정

[사진 = 호쇼트부 청해 장악]

이제는 황교가 다른 지원자를 찾아야할 상황이었다. 여기서 황교는 이미 자신들의 종파로 개종한 오이라트의 도움을 요청하게 이른다. 이 때 나선 인물이 바로 호쇼트부의 구시 칸이다. 1,636년 한 해가 저물어 가는 겨울철 결빙기를 이용해 구시 칸이 이끄는 만 명의 오이라트 병사들이 청해 원정에 나섰다.

[사진 = 구시 칸과 달라이 라마 5세 ]

여기에는 구시 칸의 호쇼트군 외에 초로스의 바아토르 홍타이지(갈단의 아버지)의 병사들과 볼가강변으로 이주했던 코 오르로크의 토르구트 병사들까지 참가했다. 말하자면 오이라트의 연합군인 셈이다. 이들은 이듬해 3만 명에 이르는 촉투 홍타이지의 할하군과 격전을 벌여 그들을 완전히 제압했다. 그 해 겨울 구시 칸은 황교의 수장 달라이 라마 5세로부터 칸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오이라트 최초 칸 탄생

[사진 = 총카파상 (게룩파 창시자)]

이렇게 해서 오이라트 최초의 칸이 탄생한 것이다. 과거 에센 타이시가 칸의 칭호를 사용한 적이 있지만 스스로 칸으로 자처했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로부터 칸의 칭호를 받은 구시 칸이 실질적으로는 오이라트 최초의 칸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 = 칭기스칸 궁전 (울란바토르 교외)]

구시 칸은 칭기스칸의 남계(男系)자손이 아니기 때문에 칸의 칭호를 받는 것은 칭기스칸 통원칙, 즉 칭기스칸 남계 자손으로 칸의 자리를 이어가야 한다는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는 티베트 불교의 도입과 함께 이 같은 원칙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칸의 지위와 함께 홍타이지라는 칭호도 등장했다. 홍타이지는 칭호 역시 칸의 부왕(副王), 즉 칸의 전권대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또한 칭기스칸의 자손에게만 허용되던 칭호였다. 이 홍타이지 칭호가 하라후루의 아들이자 갈단의 아버지에게 주어졌다. 그가 바로 바아토르 홍타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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