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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73] ▲칭기스칸 왕조의 끝은?

배석규 칼럼니스트입력 : 2018-02-14 09:57수정 : 2018-02-1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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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떠오르는 새로운 세력
다시 몽골 역사의 흐름 속으로 되돌아 가보자. 알탄 칸이 티베트 불교를 몽골로 들여온 후 몽골 사회는 이 종교의 영향을 받아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 전체는 통합되지 못한 채 여러 갈래의 세력이 복잡하게 엉켜 혼란한 정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몽골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새로운 세력이 동쪽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사진 = 여진족 근거지]

나중에 청나라를 세우게 되는 여진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춘추전국 시대 숙신(肅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한나라 때는 읍루(挹婁),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 수당시대에는 말갈(靺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리고 금나라 때부터 여진(女眞)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퉁구스 계통인 이들은 주로 동북아시아의 연해주(沿海州)와 아무르강(Amur River)에서부터 장백산(長白山)에 이르는 넓은 삼림과 하천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이들은 여진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역사의 본 흐름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12세기 아골타(阿骨打)라는 강력한 수령아래 최초의 퉁구스 제국인 금(金)나라를 세워 중원을 차지했다. 그러나 칭기스칸에 의해 금나라가 망한 뒤 이들은 다시 동북쪽으로 쫓겨 갔다.

▶누루하치의 後金 건국

[사진 = 후금 건국전 여진족 분포]

그 곳에서 과거 자신들의 조상들처럼 수렵과 어로로 살아가던 이들은 16세기 말 누루하치(努爾哈赤:노이합적)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면서 다시 한 번 도약의 기회를 맞게 된다. 장백산 동부의 건주여진(建州女眞)출신인 누루하치는 송화강 유역의 해서여진(海西女眞)과 연해주 방면의 야인여진(野人女眞)을 하나로 통합하고 7개의 부족을 합쳐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
 

[사진 = 누루하치]

1,616년 누루하치가 세운 나라의 이름은 금(金)나라를 잇는다는 의미의 후금(後金)이었다. 만주어로는 아이신 구룬(Aisin Gurun)이었다. 이때가 조선은 광해군(光海君)8년이었다. 명나라는 만력제(萬曆帝)의 치세로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몽골은 서쪽 오이라트는 할하의 지배아래 있었고 東몽골은 칭기스칸 가계의 마지막 칸인 릭단 칸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시기였다. 누루하치는 곧 이어 심양(瀋陽)을 점령하고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

▶몽골 호르친부 복속
누루하치는 흥안령 동부에 유목을 하며 살고 있던 동몽골 부족인 호르친부를 영향권 안으로 편입시켰다. 호르친부는 과거 동방 3왕가의 한 지역으로 칭기스칸의 동생 카사르에게 주어졌던 땅이었다. 누루하치는 여진족을 통합할 때 원교근공(遠交近攻) 전략을 구사했다. 즉 가까이 있는 부족은 무력으로 정복하고 멀리 있는 부족은 결혼 등을 통해 화친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사진 = 춤추는 내몽골 여인들]

누루하치는 호르친부에 대해서도 혼인을 맺어 동맹관계에 들어갔다. 동맹관계라고는 하지만 사실상은 호르친부를 복속시킨 것이었다. 누루하치에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홍타이지(皇太極)도 호르친부의 여자와 결혼해서 거기서 낳은 아들이 바로 청나라 세 번째 황제인 순치제(順治帝)가 됐다. 호르친부는 이후 청나라 시대에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며 살아간다. 호르친부의 복속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지금의 내몽골이 중국에 편입되고 외몽골과 내몽골이 분열되는 최초의 시발점으로 볼 수도 있다.

▶칭기스칸 왕조의 마지막 칸

[사진 = 홍타이지(皇太極)]

1,626년 누루하치가 죽자 여덟 번째 아들인 홍타이지(皇太極:Huang Tai ji)가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아 과업을 이어 나갔다. 누루하치가 죽은 뒤 권력이 분산돼 4명의 패륵(貝勒:beile)이 권력을 분점(分點)했다. 4번째 패륵으로 칸 위에 오른 홍타이지는 다른 패륵들의 권력을 점차 약화시키고 결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바로 몽골의 복속이었다.

[사진 = 릭단 칸]

당시 몽골의 대칸은 차하르부의 릭단 칸이었다. 다얀 칸 시대 이후 몽골의 대칸 자리는 6개의 투멘 가운데 차하르부가 칭기스칸 가계의 후손으로 이어왔다. 1,604년 대칸의 자리에 오른 릭단 칸은 분열된 몽골을 자신의 지배력 아래 통합시키기 위해 주변을 압박하고 나섰다. 특히 티베트 불교를 보호한 그는 자신을 쿠빌라이의 전생(轉生)으로 자처하며 여러 곳에 사원을 건설하고 대장경의 번역사업도 추진했다. 하지만 릭단 칸의 통합 압력을 받은 근처 오르도스와 투메트는 릭단 칸 아래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홍타이지에게 충성하는 쪽을 선택했다.

▶종언 고한 칭기스칸 왕조

[사진 = 몽골의 국쇄]


1,632년 홍타이지는 릭단 칸에 대항하는 몽골 세력을 규합했다. 그리고 고립된 릭단 칸에 대한 공격을 단행해 서쪽으로 밀어냈다. 릭단 칸은 투메트의 본거지인 후흐호트로 들어가 세력을 재건했다. 하지만 홍타이지의 공격이 이어지자 10만 명의 부락민을 이끌고 서쪽 청해(靑海) 방면으로 떠났다. 아마도 홍타이지의 공격을 피해 그 곳에다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릭단 칸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2년 뒤인 1,634년 감숙(甘肅) 지방에서 천연두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로써 칭기스칸이 대칸의 자리에 오른 1,206년 이후 지속된 칭기스칸 왕조의 몽골지배는 사실상 428년 만에 종말을 맞았다. 물론 형식상의 칸의 자리가 이어졌지만 그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대청제국 세운 만주족

[사진 = 청나라 옥쇄]

이 상황을 이용해 홍타이지는 릭단 칸의 어머니와 어린 아들을 심양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이들은 홍타이지에게 역대 몽골의 대칸이 사용하던 옥새인 ‘전왕(傳王)의 보(寶)’를 받쳤다.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옥새를 양도받은 홍타이지는 이제 칭기스칸의 천명이 자신에게로 왔다고 믿었다. 즉 몽골제국을 계승했다는 명분을 얻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1636년 심양에서 여진인과 몽골인 그리고 일부 중국인이 참석하는 쿠릴타이를 열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바로 청 태종(淸 太宗)이다.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내세운 그는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정했다. 여진이라는 종족 명칭이 만주(滿洲)로 바뀐 것도 이때였다.

▶만주인 시대의 개막

[사진 = 청황제 옥인]

내몽골의 16부는 청 태종이 몽골의 대칸 자리를 이어 받은 것으로 인정하며 복드 세첸 칸으로 받들었다. 청 태종은 5명의 황후를 모두 몽골인으로 삼았다. 그 중 세 명은 호르친부 출신이고 두 명은 릭단 칸의 미망인이었다. 그리고 릭단 칸의 아들에게는 자신의 둘째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다.
 

[사진 = 만주족 기병]

이때부터 청나라의 황제는 내륙에 대해서는 몽골의 대칸, 그리고 중원에 대해서는 중화황제라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게 된 것이다. 거대한 청나라 제국은 이 두 개의 얼굴을 사용함으로써 만주인 번영의 시대를 부르고 있었다. 또 이것이 20세기 초 신해혁명 때까지 몽골이 청나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족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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