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의 해우당 일기] 조상도 시속을 따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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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 국제뉴스국 국장
입력 2018-02-11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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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의 해우당 일기]

 

[사진=김지영 초빙 논설위원(동양대 초빙교수 · 전 경향신문 편집인)]



정말로 곡진하다. 

조상 제사를 모시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요즘 우리네 세상살이에서 어떤 교환가치도 없이, 이토록 진지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일 때가 얼마나 자주 있을까. 며칠 후면 설날이다. 무섬 마을도 집집마다 차례를 지낼 준비 속에 차분한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조상제사를 잘 모시고 손님을 잘 접대하는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은 유가, 그중에서도 제사가 많고 손님도 많았던 옛 종가의 ‘미풍양속’이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 재산의 균등 상속으로 많은 종손들은 더 이상 봉제사·접빈객의 풍속을 수행할 물적 기반이 사라졌다. 이제는 친척이나 손님들이 모여드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 이곳 북부 경북처럼 유가(儒家)의 전통이 강하고 집성촌과 종가가 많이 분포한 지역은 그나마 옛 풍속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개인적으로도 제사는 세월 따라 그 느낌이 다르다. 어릴 때 겪은 무섬마을의 제사 풍경은 아직도 뇌리 한 구석에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전깃불도 없던 시절, 큰 옛날 가옥에는 호롱불만 희미할 뿐 어둠 속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데, 독특한 음식냄새 속에 도포를 입고 유건을 쓴 어른들은 말씀도 별로 없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고···.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엄숙하고도 무서운 현실을 그때 느꼈다.

그런가 하면 재작년 여름부터 무섬마을에서 서울을 오가며 자취생활을 하면서, 나는 이웃집에 제사가 있다는 전갈만 오면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우선 오늘은 내 손으로 밥과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한 끼 잘 얻어 먹는 데다, 부엌의 아지매들이 자취하는 나에게 음복을 넉넉하게 챙겨줄 것이니 다음 날 아침도 걱정이 없었던 것이다.

‘제사보다는 제삿밥에만 관심 있다’. 도포와 유건도 장만하지 못해 번번이 맨 뒷줄에서 참례를 하면서 제삿밥에 관심 많은 나 같은 이들 때문에 생겨난 속담일 것이다. 경험칙상 제사는 조상에 대한 효심의 발로와 문중의 체제유지뿐 아니라 어려운 이웃과 음식을 나누는 기능도 있었으리라 본다.

오늘날 사가에서 지내는 제사는 세 가지가 주종이다. 조상이 돌아가신 날 지내는 기제(忌祭), 명절날의 차례(茶禮), 계절이 바뀔 때 묘소에서 지내는 시제(時祭) 등. 그밖에 집 안에 큰일이 있을 때 조상에 고하는 고유제(告由祭), 가족·친지와 함께 사회적 관계에 있는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추도식이나 위령제도 있다.

무섬마을에서는 고유제까지 4가지 제례가 일상적인데, 예안 김씨 종손인 광호씨(71)는 불천위(不遷位) 조상에 대한 기제·차례·시제도 지낸다. 불천위 제사란 신주를 묻지 않고 사당에 모셔 자손 대대로 영원히 모시는 조상의 제사. 조선 세종~세조 때의 문신으로 조선 천문학의 기틀을 세운 문절공 김담이 중시조로서 불천위인 것이다. 조선조에는 공신을 위주로 국가에서 불천위를 정했는데, 유림이나 문중에서 정하는 불천위도 있었다. 아무튼 광호씨는 고조부까지 4대 봉사(奉祀)를 하면서 연간 15차례 조상 제사를 받들어 모신다. 그것도 매번 일편단심 지극한 정성으로.

제사는 그 엄숙한 형식미와 퍼포먼스 자체가 중요한 문화유산이지만 그 같은 형식과 절차는 시류에 따라 수시로 변해왔다. 경국대전 예전편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사대부 이상은 4대 봉사, 칠품 이하 관리는 조부까지 2대 봉사, 일반서민은 부모제사만 지내도록 돼 있었다. 당시 전 국민의 80% 이상이 칠품 이상의 관리에 들지 못했으므로 국민 대다수가 부모 제사만 지냈다는 뜻이 된다. 그러던 것이 갑오경장(1894년)으로 구시대의 계급사회가 무너지자 반상의 구별이 없어지면서 오히려 너도나도 사대부의 예절을 흉내내 4대 봉사를 하게 됐다. 조상제사에 지나치게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이는 풍습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몇 차례 가정의례준칙이 제·개정되면서 제례풍습도 대폭 간소화했다. 지난 1999년 새로 제정된 건전가정의례준칙은 제사의 종류는 기제사와 차례 두 가지, 대상은 부모와 조부모 2대 봉사로 정했다.

가정의례준칙이 아니라도 이젠 누구든 예전 제례형식을 따르기가 어렵다. 가령 지방이나 축문도 후손들이 모르는 한자보다 한글로 쓰는게 타당하다. 너나없이 생업으로, 또는 취미로 노마드(유목민)가 된 오늘날 농경시대의 제례형식은 맞지 않는다. 명절 연휴 때 여행지 호텔 객실에서 휴대폰의 조상님 사진을 켜놓고 잠시 묵념이라도 하는 이는 효심이 대단한 후손이다.

해마다 가을철이면 해우당에서도 직계6촌 형제들이 1박2일 일정으로 두 차례, 5대조까지의 조상 묘소 20여 군데를 찾아 시제를 지낸다. 하지만 종형제들은 만날 때마다 “이런 행사를 언제까지 할 수 있겠나”하고 한숨을 쉰다. 실제로 북부 경북 지역의 상당수 집안은 조상 묘소 한 군데를 정해 여러 조상의 위패를 놓고 시제를 지낸다. 다른 묘소는 이장도 하지 않고 수목장과 같이 방치한다. “그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이치를 진작 생활에 반영한, 앞선 집안들이다.

제사의 본질에 대해선 고 김수환 추기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000년 김추기경은 성균관이 심산 김창숙 선생을 기려 제정한 심산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심산상 수상자는 수유리의 심산 선생 묘소에서 제례를 올리는 것이 관례였다. 천주교는 오늘날 조상 제사를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교식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행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한국 천주교 수장이 과연 유교식 제사에 응할 것인지 여론이 관심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김 추기경은 묘소에서 6차례나 절을 하고 술잔을 올렸다. 몰려든 기자들에게 김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살아 계셨으면 마땅히 찾아 뵙고 인사드려야 할 어른이니 돌아가셨다 해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결국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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