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독립투사 남자현⑩]만보산 갈등과 김동삼 구출실패, 아픔은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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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T&P 대표
입력 2018-02-08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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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슴 속에 뜬 진북의 별 하나는 조국...내 마지막 손가락을 내놓으리라

만보산 사건, 김동삼 체포 사건, 그리고 리턴조사단의 만주 방문. 세 가지 상황은 독립투사 남자현을 이리 뛰고 저리 뛰게 했다. 좌절과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가 바라보는 건 진북(眞北)에 뜬 별 하나, 오직 '조국'이었다. 찢어진 민심을 달래고, 동지를 구출하려 내달리고, 또 조국의 억울한 실상을 알릴 기회를 잡기 위해 피의 결단을 내린 그 마음에는, 오직 나라의 독립만이 비원(悲願)으로 자리할 뿐이었다.
 

[사진 = 만보산 지역의 수로. 1931년 7월2일 중국 길림성 장춘현에서 조선농민과 중국농민이 물 문제로 충돌했다.]


# 만보산 사건, 일본의 계략으로 조선과 중국이 싸우다

만보산 사건(萬寶山事件)은 그야말로 아전인수(我田引水, 내 논에 물대기)의 비극이었다. 1931년 7월 2일 만주 길림성 장춘현 삼성보(三姓堡) 만보산 지역에서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이 수로(水路) 문제로 충돌을 빚었고 유혈사태로 이어졌다.

일본은 중국인 정영덕(鄭永德, 하오융더)을 간판으로 삼아 창춘에 장롱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를 설립한다. 정영덕은 만보산 지방의 미개간지 200ha를 지주들에게서 10년간 빌린 뒤 이 땅을 조선인 농민 8명에게 10년간 다시 빌려주는 방식으로 돈벌이를 한다. 조선인 농민 이승훈은 이 땅을 빌린 뒤 조선인 180명을 이곳에 이주시킨다.

이들은 이곳에 이통강(伊通河)과 연결된 2천리에 걸친 관개수로 공사를 한다. 물길을 뚫느라 둑을 쌓다보니 인근 농지에 피해가 생겨났다. 토착 중국농민들은 현(縣)당국에 진정서를 올려 공사를 중단시켰다. 정영덕과 이승훈이 맺은 계약서에는 현(縣)의 승인을 받지 않으면 무효라는 규정이 있었으므로 사실상 더 이상 수로 개척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본 경찰 60명이 중국농민의 반대시위를 무력 진압했고 수로는 결국 준공됐다. 중국인 400명이 이에 항의하여 수로 2리를 묻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고 현장에 있던 조선족 농민, 일본 영사관과 경찰, 중국인 지주, 조선족 주민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일본 경찰은 총을 쏘았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다. 사건은 간단해 보였다. 일본이 만주를 삼키기 위해,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업기업을 이용해 수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양국의 적개심 사이에서...남자현의 설득과 중재

그러나 일본은 허위 과장 보도로 조선의 민족 감정을 부추기기 시작한다. 일본 영사와 경찰은 이 충돌에서 조선인들이 상당수 죽음을 당했다는 거짓 내용을 조선 내부의 신문들에게 뿌린다. 신문들은 이들의 말에 춤추면서 ‘중국농민이 조선농민을 죽였다’는 선정적인 내용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후 인천. 경성을 비롯한 조선 각 도시에서 대대적인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난다. 평양. 부산. 천안에서는 대낮에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중국인을 구타·학살하는 등 폭력사태가 빚어졌다. 일제는 불량배를 매수하여 폭력행위를 조장하기도 했다. 이후 동아일보가 ‘오보’임을 알리는 보도를 하면서 진정되기 시작했다.

남자현은 만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민족 갈등을 빚고 있는 조선인과 중국인 양쪽에게 ‘만보산의 진실’을 알리고 이것이 일제의 계략에서 비롯된 것임을 설명했다. 조선 내부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들끓고 있을 때, 만주에서 오히려 양쪽의 불화가 크지 않았던 것은 남자현의 열정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하얼빈 옥중에 있던 김동삼을 면회하고...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독립군 색출 작업이 강화되면서, 김동삼이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하얼빈에 있는 정인호(鄭寅浩)의 집에 투숙하다가 동지 이원일(李源一)과 함께 일제의 수색에 걸려든 것이다. 김동삼은 남자현의 고향 동지이자 만주의 최고 지도자였다.
 

[사진 = 일송 김동삼 선생(연합뉴스)]



그녀는 급히 하얼빈으로 달려가 자신을 김동삼의 친척이라고 말하고 그와 면회를 한다. 그녀는 김동삼의 지시를 받으며 긴급 연락책으로 활약했다. 남자현은 그가 신의주로 이송된다는 정보를 접수하고, 직접 구출작전을 펴기로 마음 먹었다. 그녀가 무기를 준비해 열차로 달려갔을 때, 김동삼을 볼 수 없었다. 일제가 이동 날짜를 갑자기 변경했기 때문이었다. 허탈감과 함께 그녀는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만주에서 김동삼이 사라진 것은 남자현에게는 정신적 지주가 무너지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김동삼은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이감된 뒤,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3월 3일 순국한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는 옥중 유언에 따라 유골은 한강에 표장(漂葬)된다.

# 60세 여자, 남자현...하얼빈 미디얼호텔에 간 까닭

고정희의 시 ‘남자현의 무명지’는, 마지막 단지(斷指) 사건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일제의 도마 위에 섬섬옥수 열 손가락을 얹어두고, 남자현은 나라 잃은 부조리를 또박또박 따진 뒤 무명지를 단칼에 내려치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다. 섬뜩할 만큼 비장한 장면이다. 1932년 9월, 남자현 나이 60세때의 일이다.

1932년 3월1일 일제는 만주국을 세운다. 만주사변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이 커지자 국제연맹은 현장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한다. 일제는 만주국 수립이 강제 침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중국 내부에서 스스로 요청해서 이뤄진 일이라는 점을 국제사회에 강조하고 있었다. 국제단체의 눈을 속이기 위해, 일본에 대한 내부의 환영분위기를 연출했고, 현지 언론을 봉쇄하고 투쟁적인 행동을 은밀하게 탄압했다. 

이런 가운데 리턴조사단(Lytton Commission)이 하얼빈으로 온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관동군은 전쟁 불확대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전선을 확대하였다. 당초에는 일본의 만주출병을 치안유지 차원의 조치로 보고 호의적이던 국제연맹은 1931년 10월 8일 금주(錦州) 폭격을 접한 뒤 일본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당시 연맹 회원국이 아니었지만 반일 강경론을 펴던 미국을 이사회의 입회인으로 받아들여, 일본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에 일본은 중립적인 조사단 파견을 제안하였는데, 이사회 결정 결과 1932년 1월, 영국 리턴경(卿)을 단장으로 하여 이탈리아의 알드로반디 백작, 프랑스의 H.클로델 중장, 미국의 F.R.맥코이 소장, 독일의 H.슈네 박사 등이 조사단으로 임명됐다. 일행은 2월 29일 도쿄에 도착했고, 3월 14부터 4월 19일까지 상해, 북경, 한구(漢口)를 답사한 뒤 6월 4일까지 만주지역을 조사한다. 이후 리턴 일행은 도쿄로 다시 돌아갔고 보고서는 베이징에서 작성한다. 이들이 조사 결과를 공표하는 것은 10월2일이다.

그런데 남자현이 무명지를 자른 것은 9월17일로 되어 있다. 조사단이 만주 일대에서 조사 활동을 펼치던 때(4월~6월)와는 시기상 맞지 않는다. 이들이, 남자현이 침투해있던 하얼빈에 머무른 기간은 14일간이었다. 따라서 리턴이 조사 결과를 공표하기 직전에 하얼빈에 와서 머물렀다는 얘기가 된다. 이들은 조사 내용을 최종 점검하고 재확인하기 위해 이곳에 온 듯 하다. 남자현은 이들이 만주를 조사하던 그해 여름에 첩보를 접했을 수 있으나, 조사단의 잦은 이동으로 접근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조사 결과를 최종 정리하기 위해 하얼빈 마디얼호텔에 머문 시기를 노렸다.
 

[사진 = 중국 하얼빈역 역사.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장소. 1909년의 일이다.]



리턴은 9월 19일 하얼빈에 도착해 10월 2일까지 여기에 있었다. 최종 발표는 하얼빈에서 했을 수도 있고 막판에 장소를 옮겨서 했을 수도 있다. 보름 가까이 하얼빈에 머무는 외국인들. 남자현의 눈에는 외세의 침탈에 압사해가는 조선의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는 더할 나위없는 글로벌 메신저로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왼손 손가락을 내려다 보았다. 두 번 이상의 단지 혈서를 쓰느라 이미 엄지와 검지의 끝자락이 잘려나가고 없었다. 남은 세 손가락 중 무명지를 택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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