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독립투사 남자현⑦]1948년 잡지 '부흥'이 보도한 남자현 단지(斷指)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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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T&P 대표
입력 2018-02-05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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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목현 시절 남자현이 단지(斷指)를 한 사건에 대해서는 해방 이후 잡지 <부흥>에서 소개하고 있다.
 

[사진 = 전북우정청이 2016년 발행한 호국영웅 기념우표 '남자현'.]



조선 민족의 결점은 당파와 분쟁이라. 이로써 나라가 망하였거늘 조국 광복을 운동하는 그네들이 또 외지에 가서도 당파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서북파니 기호파니 안파니 이파니 하여 1922년 3월부터 8월까지 남만 환인현 등지에는 동족 간에 피 흘리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김리대씨가 특파되어 화해공작에 애썼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선생(남자현)은 이 일을 크게 근심하여 산중에 들어가서 한 주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고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글을 써서 책임관계자들을 소집하였다. 그 성의와 순국정신에 감격한 소위 독립운동 간부들은 누구나 그 뜨거운 눈물과 죽음을 각오하는 피의 설유에 각각 잘못을 회개하고 완전한 쌍방간의 화합이 성립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환인·관전 등지의 주민들은 그 은공을 감사하여 곳곳마다 나무로 비를 세워 그 공덕을 표창하고 만주 각층 사회에서는 누구나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잡지 <부흥> 1948년 12월호, ‘독립운동사상의 홍일점, 여걸 남자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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