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66] 알탄칸은 어떤 변화를 불러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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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2-07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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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알탄칸의 등장

[사진 = 알탄 칸(몽골국립박물관 소장)]

보디 칸 시절에 몽골 역사에 남을 또 한 명의 칸이 탄생하게 된다. 알탄 칸이라 불리는 이 인물은 다얀 칸의 손자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다얀칸의 셋째 아들 바르스 볼로드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아버지에 이어 지금 중국 내몽골의 주도 후흐호트를 중심으로 하는 투메트 투멘의 군주였다.
 

[사진 = 후흐호트 일대]

후흐호트는 과거 흉노의 본거지이기도 했던 곳이다. 비록 칸의 아들과 손자들이기는 했지만 다른 지역의 수장은 칸의 호칭을 사용할 수 없었다. 대칸의 자리는 차하르 부족에서 이어갔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수장은 지농, 즉 진왕이라 불렀다. 알탄 칸은 우익 지농의 아들로 형이 지농의 지위를 이어 받았기 때문에 타이지, 즉 황태자(皇太子)라는 칭호를 사용했었다.

지농의 지위는 그의 형에서 조카에게 넘겨졌지만 실력을 키운 알탄은 조카를 대신해 투메트를 다스리고 주위 세력을 압도하는 상황이 이르렀다. 그런 알탄에게 당시 대칸인 보디 칸은 투시에트 세첸 칸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투시에트는 보좌(補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호칭으로 정식 칸은 아니지만 대칸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칸이라는 이름을 내린 것이다.

보디 칸이 알탄에게 칸의 칭호를 내릴만한 충분한 이유는 있었다. 그는 한 지역을 다스리는 군주지만 전 몽골을 다스리는 칸을 능가할 만큼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보여줬고 명목상인 대칸을 압도할 정도로 몽골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기 때문이었다.

▶ 몽골 역사에 족적 남긴 인물

[사진 = 후흐호트 중심지]

정식 칸이 아니었지만 칸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알탄 칸은 몽골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다스렸던 지역은 투메트, 즉 지금의 내몽골자치구의 주도 후흐호트를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는 몽골민족의 생활과 문화의 방향을 결정짓는 대 개혁을 단행했다.

그 결과 현재의 몽골인들 까지도 당시 알탄 칸이 선택한 조치의 영향권 안에서 살고 있는 실정이다. 무려 40년에 가까운 긴 통치 기간 동안 알탄 칸은 몽골에 어떤 변화를 불러왔을까?

▶ 알탄 칸 시대에 첫 곡물재배

[사진 = 후흐호트 고층 건물]

중국 내몽골 자치구의 주도(主都) 후흐호트는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시내 중심가에 솟아오르는 고층 건물들은 이곳이 과거 유목민들이 살았던 초원이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만큼 급속히 현대화의 길을 걷고 있다. 도시 교외를 나가봐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가축들이 풀을 뜯고 게르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초원의 모습은 더 이상 보기가 쉽지 않다. 과거에 초원이었던 곳이 각종 작물을 재배하는 농경지로 바뀐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사진 = 후흐호트 농경지]

주변의 초원이 거의 대부분 농경지로 바뀐 것은 이 지역이 중국 땅이 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하지만 이 지역에 곡물이 처음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후반 알탄 칸이 이 지역을 다스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유목민들은 통상 곡물 재배를 자신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로 여겼다. 곡물이 필요하다면 교역을 통해 또는 약탈 등을 통해 다른 곳에서 확보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인식은 지금의 몽골인들에게도 강하게 남아 있어서 그 넓은 초원에서 농경지를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

▶ 明 공격으로 칭기스칸일족 전통 살려

[사진 = 알탄 칸 만리장성 공격(몽골국립박물관)]

유목민 사회에 곡물 재배의 관습을 들여온 것은 중국인들이었다. 알탄 칸이 다스린 지역은 명나라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교역을 원했지만 명나라는 몽골인과 거래를 별로 하고 싶지 않았던 탓인지 이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한 명나라의 태도는 몽골의 군사적 공격을 불러왔다. 1529년 알탄 칸의 군대는 산서성 북부의 대동(大同)을 공격했다.

이듬해에는 감숙성의 영하지역을 약탈한 뒤 북경 서북방의 선화(宣化)를 공격했다. 알탄 칸은 1534년 명나라 조정에 조공 사절단을 보내겠다고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몇 차례의 요구가 거절당하자 알탄 칸은 1542년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그가 이끄는 몽골군은 중국의 명장 장세충(張世忠)을 죽인 것을 비롯해 20만 명을 살육하고 많은 중국인들을 포로로 잡아왔다.

건물 8만 채를 불사르고 가축 2백 만두를 빼앗아 오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1550년에는 북경의 성문까지 진격해 도시 외곽을 불태우기도 했다. 중국 역사는 이를 경술지변(庚戌之變)이라고 부른다. 이때가 명나라의 세종(世宗) 가정제(嘉靖帝)시대로 그는 알탄 칸 군대의 공격으로 곤욕을 치렀다. 반면 알탄 칸은 중국을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는 칭기스칸 일족의 오랜 전통을 부활시킨 셈이 됐다.

▶ 푸른성 후흐호트 탄생

[사진 = 후흐호트의 내몽골인들]

이 전쟁의 결과로 많은 중국인들이 몽골로 들어와 살게 됐다. 우선 많은 전쟁 포로와 명나라의 도망병은 물론 생활이 어려운 중국인과 백련교도 등이 몽골의 유목지로 들어와 알탄 칸의 비호아래서 살게 됐다. 바로 이들 중국인들이 후흐호트 주변 지역에서 살면서 과거 중국 땅에서 해오던 대로 초원에다 곡물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 = 알탄 칸 공격 후 정비된 만리장성]

곡물재배뿐 아니라 유목민 사회에 고정가옥이 생겨나는 변화도 뒤따랐다. 1563년에는 40여개의 크고 작은 촌락이 형성돼 주민수도 만 6천명에 이르렀다. 1570년에는 5만 명, 1583년에는 10만 명으로 불어날 정도로 급속히 정주민 사회로 바뀌어갔다. 몽골인들은 초원의 집단 정주촌을 바이싱(Bayising)이라고 불렀다. 중국인들은 알탄 칸을 위해 중국식 성(城)을 지었다.

명나라가 귀화성(歸化城)이라 이름을 붙였던 이 성은 푸른 성이라는 의미를 담아 후흐호트라 불려 졌고 그 것이 지금까지 이 도시의 이름이 됐다.

▶ 명나라와 활발한 교역

[사진 = 삼낭자 추청도]

알탄 칸은 명나라 융경제(隆慶帝)시대들어 손자가 명나라로 망명한 사건을 계기로 명나라와의 화친을 도모하게 된다. 1570년 알탄 칸의 손자 다이칭 에제이가 명나라로 망명했다. 이는 알탄칸이 다이칭 에제이의 아내로 온 삼낭자(三娘子)의 미모에 혹해 자신의 부인으로 삼으면서 빚어진 일이었다. 알탄 칸은 손자의 송환을 요구하자 명나라측은 바이싱(漢人 집단촌)에 있는 한인 수령들을 돌려줄 것으로 조건으로 내세웠다.

[사진 = 이렌호트 시장(몽골/중국 국경지역)]

1571년 몽골과 명나라 사이에 화친 협상이 이루어지면서 오래 동안 계속돼 온 두 나라 사이의 항쟁은 일단 막을 내렸다. 화친 협상 결과 조공을 연1회 실시하기로 했다. 또 몽골과 중국의 국경지대인, 선부, 대동, 산서에 연 1회 정기 교역시장인 호시(互市)를 개설하기로 했다. 몽골의 가축과 가죽제품, 유제품 등이 중국으로 넘겨졌고 명나라의 일용잡품과 직물 농산물 등이 몽골로 넘겨졌다.

강화조건에 따라 명나라는 몽골의 영주들에게 수당까지 지급했다. 명나라는 알탄 칸에게 순의왕(順義王)이라는 칭호까지 내려줬다. 후흐호트는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유목 문화와 정주문화가 뒤섞인 교역의 중심도시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알탄 칸의 부인이 된 삼낭자는 알탄칸이 죽은 뒤 알탄칸의 아들에게 재가하는 등 40년 동안 세 명의 칸을 남편으로 두고 정치에 영향력을 미쳤다.

그녀는 병권(兵權)과 공시(貢市)를 장악하는 등 명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이 때문에 명나라는 1587년 그녀를 충순부인(忠順婦人)으로 책봉하기도 했다.

▶ 동몽골, 티베트 불교 개종

[사진 = 초원의 게르촌]

그래도 알탄칸은 선조 쿠빌라이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성안에 머물지 않고 근처 초원에 게르를 짓고 오르도에서 생활하며 지냈다. 알탄 칸은 정주 문화의 안일함에 젖는 것을 경계한 칭기스칸의 유훈을 떠올리며 중국 문화가 들어와 몽골의 정체성을 잃게 만드는 것을 경계했다. 알탄칸이 영향력을 확대한 것은 중국 쪽뿐만 아니었다.

오이라트를 더욱 서쪽으로 밀어내고 현재 몽골의 영토 대부분을 확보했다. 또한 티베트 방향으로 진출해 청해 지역까지 몽골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알탄 칸은 티베트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몽골이 티베트 불교로 개종하게 되는 것도 그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티베트 불교로의 개종은 몽골의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는 물론 정신세계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온다는 점에서 몽골역사의 한 전환기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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