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독립투사 남자현⑥]독립군들을 동상에서 구해준 '만주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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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T&P 대표
입력 2018-02-04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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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의 벽을 타고올라 뛰어다닌 남자현 발자국"괴소문까지…죽음이 일상이 돼버린 살벌한 만주

# 만주생활의 발견, 남자현은 벼농사 보급과 교육부터 시작했다

초기에 남자현은 아들과 함께 통화현의 한 시골마을에 집을 짓는다. 통나무를 우물 정(井)자 형태로 거듭 쌓아 지붕을 돌이끼로 덮는, 이 일대 특유의 ‘틀방집’이었다. 이 무렵 서로군정서 부독판을 지낸 여준(呂準, 1862-1932)이 많이 도와주었다. 여준은 여조현(祖鉉 ·肇鉉)으로도 불렸다(호는 시당(時堂)). 정주 오산학교 교사 출신으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웠던 교육자이다. 그녀는 11세 연상의 그에게 사석에선 ‘여선생’이라고 부르고, 그는 그녀에게 ‘남선생’이라고 부르며 서로 성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남자현은 그곳의 노래민(老來民, 오래 전에 이주해온 조선족)의 도움으로 밭뙈기를 얻어 농사를 짓는다. 그때까지도 만주에는 벼농사가 거의 없었고 평지는 토지 얻기가 어려워 대개 우거진 원시림 산비탈에 불을 놓아 화전을 개간했다. 감자와 옥수수, 보리,메밀을 심어 연명했다. 특히 메밀은 풀밭에 아무렇게나 씨를 뿌려놓아도 쑥쑥 자랐다. 겨울에는 메밀국수가 든든한 양식이었다.
 

[사진 = 만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 '좋은놈,나쁜놈,이상한놈'의 한 장면.]



이곳에선 석유가 귀해서 거의 구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전나무 뿌리를 캐서 그것에 불을 붙여 들고다니며 등잔불로 대신했다. 또 소금도 몹시 비싸고 귀했다. 소금장수가 오면 동네사람들은 저마다 강냉이를 봇짐채 들고 나왔다. 소금 한 줌에 강냉이 한 짐을 모두 줘야 했다. 만주는 땅도 넓지만 하늘도 더 넓었다. 처마밑 별이 쏟아지는 추운 하늘 아래 허술한 옷을 걸친 아이들이 파랗게 떨며 별빛을 받고 있었다. 조선 사람이 모여사는 곳이면 그러나 어디든 학교는 있었다. 그때고 지금이고 교육열만큼은 뜨거웠다. 남자현은 이 교육열이 겨레의 희망이라고 판단했다. 무기도 중요하지만 결국 저 몽당연필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믿었다. 만주는 워낙 광활하게 비어있는 땅이라 사람들이 몰려 들어온다 해도 별로 표시나지 않고 띄엄띄엄 흩어져 살게 된다. 집집마다 가축을 많이 키웠다. 특히 닭과 돼지가 많았다. 남자현도 닭 100여 마리를 사서 길렀다. 창고에 널려있는 옥수수를 사료로 썼다. 손님이 찾아오면 닭을 잡아 대접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계란으로 군것질을 했다. 삼실로 달걀을 칭칭 감아서 불 위에서 구워먹는 것을 즐겼다.

남자현은 일송선생이 일궈놓은 백서농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끝없이 들어가는 산 속에 있었다. 독립운동을 하는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농사를 짓고, 수익은 군자금으로 쓰는 둔전(屯田)이었다. 김동삼은 산을 일궈 논을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벼농사를 보급하였다. 현재 중국 동북지역에 논이 없는 곳이 없을 만큼 일반화되었는데 이런 농사의 변화에는 일송을 비롯한 독립운동가의 노력이 숨어 있다. 남자현 또한 벼농사에 필요한 수로(水路) 활용과 모내기에 대한 컨설팅을 해주기도 했다.
 

[사진 = 만주를 배경으로 다룬 영화 '좋은놈,나쁜놈,이상한놈'의 한 장면.]



# 무법의 이국땅, 살기보다 죽기가 더 쉬웠다

하지만 만주의 삶은 언제 어디서 ‘죽음’과 ‘폭력’이 덤벼들지 모르는 불안하고 암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의 독립운동군은 세 갈래로 형성되었다. 광복단 단원이던 김좌진이 북간도 왕청현으로 가서 대종교 지도자인 서일과 손잡고 만든 북로군정서가 있었고, 이시영, 이동녕, 이상용이 만주 액목현에 근거지를 두고 창설했고 사령관으로 이청천을 둔 서로군정서가 있었다. 또 봉오동에 근거지를 둔 홍범도가 만든 대한독립군도 있었다. 이들은 각각 경쟁적으로 투쟁을 벌여 상당한 전과(戰果)를 올렸는데 봉오동 전투에 이은 청산리 전투가 그 백미였다. 1920년 10월 16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에서 김좌진은 매복 작전으로 일본군 선발대를 대파하고 기세를 몰아 본부대와 일본 사단본부가 있는 마록고지를 향해 전진한다. 이틀 낮밤 동안 전투가 펼쳐졌다. 일본군 사상자는 3,300여명에 이르렀고, 독립군 전사자는 90명이었다. 압승이었다. 그러나 승리를 기뻐하기도 전에 일본군들의 무자비한 보복 대학살이 시작됐다. 당시 축성에 있었던 미국 장로교 선교사 마틴의 수기를 잠깐 들여다보자.
 

[사진 = 봉오동전투 기록화. 1920년6월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홍범도가 이끈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 대대를 무찌르고 승리한 전투.]



“10월 31일 연기가 자욱한 찬랍읍 위성에 가보았다. 사흘전 새벽 무장 1개대대가 예수교 마을을 포위하고 남자라면 노소를 막론하고 끌어내어 패죽였다. 겨우 살아있는 사람은 불타는 집이나 짚더미에 던져 타죽게 했다. 이 상황을 울지도 못하고 바라보던 아내와 어머니 가운데는 땅바닥을 긁어 손톱이 뒤집힌 이도 있었다. 사흘을 타고도 다 못 탄 잿더미 속에서 한 노인의 시신이 나왔는데 몸에 총구멍이 세 군데나 있었고...(중략)...반쯤 탄 19채의 집에 돌아다녀 보니 할머니와 며느리들이 잿더미 속에서 덜 탄 살덩이와 부서진 뼈를 줍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렸다.”

왜군들은 500명의 보병이 기관총과 야전탄으로 무장해 봉천, 홍경, 왕청, 동대파자, 대황강, 탄박강 등 남만주 일대까지 휩쓸었다. 수많은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생매장 했고, 수백 호의 부락이 그들이 지나가고 나면 10여 명만 살아남기도 했다. 이것이 만주였다. 무자비한 것은 일본군 만이 아니었다. 일본은 항일 집단에 대해서만 경찰력을 행사할 뿐, 일반 치안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곳에는 마적떼와 비적, 공산주의자들도 들끓었다. 만주의 어느 구석에 숨어있어도 평화는 늘 잠정적인 고요일 뿐이었다. 살아있는 것은 지금 숨쉬는 것일 뿐, 무법의 이국땅에서 ‘죽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남자현은 그런 살벌한 땅에서 학교를 열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몰두했다.

# 액목현의 남자현, 독립군의 어머니라 불리다

통화현에서 보이던 남자현의 행적은 다시 액목현(額穆縣)으로 옮겨진다. 통화현과 액목현은 모두 길림성에 있는 도시이지만, 성(省)의 이쪽 변경과 저쪽 변경인지라 거리가 만만찮게 멀다. 통화현은 서남쪽의 요녕성에 가깝지만 액목현은 동북쪽의 흑룡강성에 다가가 있고 조선의 국경으로부터도 더 멀어졌다. 남자현은 왜 액목으로 활동무대를 옮겼을까. 이 이동에는 일본의 독립군 토벌 전략이 맞물려 있다. 1920년 8월 일제는 항일독립군 활동이 점차 기세를 올리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이들을 협공 작전으로 토벌하려는 전략을 펼쳤다. 시베리아에 출병한 19사단이 남하하고 나성에 있는 21사단이 북상하여 안쪽에 있는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군사집단들을 옥죄는 방법이었다. 독립군 진영은 이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긴급이동계획을 세운다. 서로군정서는 안도현 삼림을 통과하여 북간도로 빠져나갔다. 서로군정서의 각 기관은 액목현으로 근거지를 바꾼다. 이때 남자현 또한 근거지를 옮긴 것이다. 이 해 10월에 청산리 전투가 있었고 일본군들의 보복만행이 있었다.

이 대목에서 상당히 중요한 에피소드 하나가 등장한다. 청산리전투 이후 적에게 쫓겨 숨어다니던 독립군 10여 명이 액목현 남자현이 살던 집에 우연히 들어온 것이다. 일부는 부상을 입고 있었고 추위로 대부분 동상이 심했다. 이들은 문을 들어서자마자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마당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자현의 집은 긴급히 이사한 뒤 임시로 바람만 막아놓은 곳이라, 이들을 치료할 데가 없었다. 그녀는 마을 구장(區長)인 조선인 이규하의 집으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다. 이구장은 일본군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난색을 표했다.

남자현은 이렇게 말했다. “이들이 무엇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것입니까? 바로 구장님과 저를 위해서 저렇듯 젊은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각오로 싸웠지요. 우리가 목숨 따위를 걱정하여 저들을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이규하는 그 말을 듣고 몹시 미안한 표정이 되었고, 부상자들을 업어 자기 집 마루로 날랐다.

병사들을 따뜻한 방으로 들이려 하자 남자현은 소리쳤다. “동상자는 그렇게 치료하면 안됩니다. 이 집에 불을 때지 않는 창고 방이 없는지요?” 이규하가 냉방으로 안내하자 남자현은 마당 한켠에 있던 비어있는 큰 독 4개를 방으로 옮겼다. 거기에 차가운 물을 반쯤 채운 뒤 병사들에게 모두 그곳에 들어갔다 나오라고 말했다. 그들이 어리둥절해 하자, 남자현은 말했다. “나를 믿으시오. 예전에 영양에 살 때에 의병들이 집단 동상으로 우리 집을 찾았을 때 아버지가 가르쳐준 방법이오.” 그들은 차례대로 알몸으로 독 안에 들어가 30분씩 냉수찜질을 했다. 남자현은 마치 아들을 씻기듯 온몸을 부드럽게 닦아주고 안마를 했다. 따뜻한 방으로 옮겨 음식을 대접했다. 뜻밖의 세심한 배려와 보살핌에 어린 병사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때 남자현은 말했다. “큰 일 하는 사람이, 눈물이 웬 말인가? 그대들의 몸과 마음에 나라가 달려 있으니, 우리에겐 이만한 보람이 어디 있겠나?” 이날 이후 독립군들 사이에서 남자현은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나이도 나이이지만, 육친처럼 챙겨주는 자애(慈愛)에 병사들이 크게 감격한 까닭이었다.

# 집 벽을 뛰어다니는 신출대장 괴소문까지

이런 소문은 과장되게 퍼져나가 남자현을 불편하게도 만들었다. 액목현 대황지 윤상무(尹相武)라는 사람 집에는 이야기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잠시 와서 기거했던 것 같다. 그는 액목현에 ‘독립군 여자대장’이 나타났으며 신출귀몰하여 벽을 타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내공을 지니고 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 사람은 윤상무의 집 벽에 발자국을 찍어놓고 ‘신출대장(神出大將)’의 흔적이라고 말했다. 뛰어난 리더를 갈구하던 그곳 지역 사람들의 입을 통해 소문은 발 달린 듯 일대로 퍼져나갔다. 만주에 있는 많은 동포들과 교육기관 선생들이 이곳으로 달려와서 발자국을 보면서 감탄하고 가는 상황이 됐다. 이런 신이(神異)한 것들을 좋아하고 믿는 사람들은, 남자현을 교주(敎主)로 추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기도 했다. 그녀는 이런 소문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주변사람들과 함께 사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조사했다. 그리고 그런 장난을 친 동포와 그 가족들을 마을에서 축출했다. 사람들은 자신을 추앙하는 분위기를 물리치고 실상을 바로잡은 결단에 대해 장하다고 말했다.        이상국 아주T&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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