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준의 지락필락智樂弼樂] 차례상에 차(茶)를 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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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준 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입력 2018-02-0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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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용준 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중여서준(衆艅犀樽)'은 코뿔소(犀) 모양으로 만든 술잔(樽)으로, 중국 상(商)나라(BC 1600~BC 1046) 혹은 그 이전에 만들어진 청동 제기(祭器)다. 높이 22.9㎝, 길이 37㎝로 술잔으로는 매우 크기 때문에 일상용품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상나라는 고고학적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중국의 가장 오랜 국가다. 상나라는 한때 은(殷)나라로 부르기도 했지만, 은은 상 왕조의 마지막 수도로서 상 왕조가 멸망한 뒤 주(周)나라에서 상의 주민을 낮게 호칭하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정확한 명칭은 상(商)이다.

중여서준은 청나라 8대 황제인 도광(道光) 연간(재위 1820~1850년)에 산동성(山东省) 수장현(寿张县) 양산(梁山)에서 발굴되었다. 이때 7개 제기가 출토돼 '양산칠기(梁山七器)'라 불렸는데, 이 중 코뿔소 술잔은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미국 에이버리 브런더지(Avery Brundage) 컬렉션으로 1920년대 초 해외에 반출된 후 나중에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에 기증되었다. 아시아미술관은 2000여점의 중국 도자기를 포함해 1만5000점이 넘는 아시아 예술품을 소장한 세계 최대의 아시아 컬렉션을 자랑한다.

이 코뿔소 술잔이 미학적 가치 외에 더더욱 중요한 것은 몸체에 새겨진 4행 26자의 상형문자 때문이다. 학자들이 밝혀낸 이 문자의 뜻은 ‘제곡(帝嚳) 10년, 즉 기원전(BC) 2411년 5월 5일 경술년에 임금이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에 와서 사당에서 제사(차례)를 지냈다. 임금이 배행한 중여(衆艅)에게 신농씨(神農氏) 때 만든 돈(주패)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해석하자면 임금이 제사를 지내면서 중여에게 돈을 주어 종묘에 비치하는 제기인 이기(彛器)를 만들라고 했다는 것이니, 이 코뿔소 잔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연원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산동성 곡부(曲阜)는 중국 발음으로는 ‘취푸’인데, 공자의 탄생지다. 그러나 우리 고대사를 중국 본토로 확장하는 재야사학에 따르면 환웅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고조선 이전의 신화적인 도읍지 또는 국가인 '신시(神市)'가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논란의 여지가 있으므로 더 이상의 얘기는 하지 않겠지만 신농씨, 즉 염제(炎帝) 또한 우리 조상의 뿌리로, 제곡(帝嚳)을 고조선 4대 임금으로 본다.

어쨌든 중여서준은 임금이 차례, 즉 제사를 지낸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상당하고, 중국인들도 지내지 않는 명절 때의 제사를 왜 유독 한반도에서만 지내고 있는지 그 실마리가 된다.

명절 때의 제사를 우리는 흔히 '차례(茶禮)'라고 한다. 설날이나 추석 때의 제사를 우리는 ‘차례 지낸다’고 하지 ‘제사 지낸다’고 하지 않는다. 차례는 달이 생기는 초승(초하루)과 달이 차는 보름 두 차례씩 정성 들여 제를 지낸 제사가 설날과 추석 등 우리 겨레만의 민속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그것이 진짜 우리 선조가 할아버지(神) 신농씨와 아버지(主) 대직씨(大稷氏)를 상징하는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 것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차례’라는 말은 제사상에 차를 올렸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차를 올리지 않았다면 아마 다른 말로 불렸을 것이다. 중국 호남성에서는 햇차가 나오면 제일 먼저 차신(茶神)인 신농씨에게 차를 올리고, 염제릉(炎帝陵)도 '차릉(茶陵)'으로 불린다. 그런데 지금 우리 제사상에서 차가 사라진 것은 과연 어떤 연유일까?

옛날 우리는 지금 일본처럼 가루차(말차)를 포함해 차를 많이 마셨지만, 근대 이후 이런 습속이 거의 사라졌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처음에 차는 달여서 탕으로 마셨다. 가례(嘉禮)에서는 가루차를 잔 속에 넣고 끓인 물을 부은 다음 찻솔로 휘젓는데, 지금 일본차가 모두 이와 같다”고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관리인으로 암스테르담 시장을 13차례나 역임한 니콜라스 비첸(Nicolas Witsen)도 아시아 기행문에서 “조선 땅에는 많은 차가 생산되고 있다. 그것을 가루 내어 뜨거운 물에 타 먹는데 온몸을 찌푸리는 듯이 마신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차 음용이 매우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 차 문화는 임진왜란 이후 나라 전체가 경제적으로 피폐해지면서 함께 쇠퇴해 문인과 승려들 사이에서나 드물게 행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차례에 정작 차를 올리지 않으면서 명절을 멀리하고 귀찮게 여기는 작금의 풍속이 생겨났다. 기름 냄새 범벅이 되도록 전을 부치고, 하루에도 수없이 설거지를 해야 하니 여자들은 어느 누구도 명절을 반기지 않는다. 부부와 부모자식 간에도 갈등이 생긴다. 명절 제사상에 차를 부활시키자. 간단한 차례만으로 차를 나누어 마신다면, 꾀병을 부려서라도 명절을 지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사라지고 화목한 가족의 평안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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