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집착執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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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02-0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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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반복(反復)
나의 일상은 반복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내가 하던 일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대부분 아무런 생각 없는 습관적인 행동들이다. 요즘은 방학이 되어 집안에서 똑같은 일들을 하면서 소일한다. 내가 사는 지구도 그렇다. 지구는 지난 50억년 동안 태양 주위를 쉬지 않고 항상 같은 자리를 수없이 돌았다. 마당에 서있는 능수벚나무도 반복을 수행한다. 변화가 없이 서있는 능수벚나무이지만, 일년 주기로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지구의 공전과 자전의 순서에 맞춰 봄이 되면 잎을 내고 자란 후 자신의 잎들을 자연스럽게 땅에 떨어뜨리고, 겨울이면 거의 죽은 것처럼 지내다가 봄이 되면 다시 잎을 낸다.
 
반복이 지속되면 집착(執着)이 된다. 우리는 쉽게 자신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 의미를 잘 모르는 어떤 것에 무의식으로 쉽게 동의해 집착한다. 우리는 그것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일부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은 이데올로기의 화신이다. 그것에 노예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은 옳고 남이 틀리다고 어리석게 말한다. 인간은 자연과는 달리 그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기를 시도했다. 그런 탈출은 인위(人爲)라고 부른다. 인위는 자연의 자연스러운 흐름인 천위(天爲)와는 달리 자신의 미래를 위해 최상의 전략을 짜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인간은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동물과는 구별되는 문화와 문명을 구축했다. 영어로는 이런 노력을 ‘아티피셜’(artificial)이라고 부른다. 즉 ‘자신을 위해 최선(art)을 강제적으로 만드려는’(ficial, ‘만들다, 제조하다’는 의미의 라틴어 ‘파케레’facere에서 유래) 마음의 상태다. 그렇게 인류문명을 만든 선조들의 ‘유물’을 '아티팩트’(artifact)라고 부른다.
 
일상으로부터 탈출해 인위적인 무엇인가를 만들려는 시도를 ‘엑스터시’(ecstasy)라고 부른다. 엑스터시는 일상(state)으로부터 탈출(ek-)하려는 인간의 인위적인 행위를 지칭하는 개념이었으나, 고대 종교인들이 이 단어를 장악해 그 광범위한 의미를 축소해버렸다. 우리는 엑스타시를 ‘황홀경’(恍惚境)으로 번역해 사용한다. 황홀경은 외부의 극단적인 자극을 통해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적인 행위다. 그러나 엑스터시는 원래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자신의 상태를 응시해, 자신에게 감동적이며 예술적인 새로운 인위를 추구하는 시도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진부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내가 검토해야 할 가장 시급한 대상은 무엇인가?
 
생각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가온 ‘오늘’이라는 소중한 순간을 나의 소유로 온전히 만들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이 있다. 관문이란 나에게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생각의 대상으로 삼아 깊이 응시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 제3자가 되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3인칭으로 검토한다. 내 머리의 생각은 입을 통해 말로 나오고, 내 말들을 기반으로 내 행동이 구체화되며, 이 행동들은 반복되어 습관이 된다. 환경이란 이 습관이 확대된 터전이다.
 
생각은 무의식으로 자연스럽게 나에게 등장해 나의 일상생활을 장악하는 시작 버튼이다. 히브리 성서 ‘잠언’에 생각의 중요성을 적나라하게 표시한 구절이 있다. “사람이란 그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그것이다.” ‘잠언’의 저자는 ‘샤아르’라는 히브리 동사를 사용해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표현했다. 샤아르는 원래 성문 문지기가 성문 위에 서서 성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헤아리는 행위를 의미한다. ‘생각’이란 지금-여기라는 새로운 시간과 장소에서 다음 단계로 약진하려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관찰이다. 내 묵상의 대상은 같은 생각을 반복하는 내 자신의 생각이다.
 
흔적(痕跡)
나는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내 생각’의 포로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유무형의 삼라만상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무심코 하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내가 떠올린 생각은 내 머릿속에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바로 기억(記憶)이다. 이 기억은 내 머릿속 중앙처리장치에 보관돼 있어, 다시 내 생각을 촉발시킨다. 생각이 흔적을 남긴다. 나의 생각은 내가 아무리 내밀해도 내 마음의 밭에 흔적을 남긴다. 인도인들은 이 흔적을 ‘삼스카라’(saṃskāra)라고 부른다. 삼스카라는 ‘마음에 새겨진 인상, 기억, 심리적인 흔적’이다. 이 흔적은 숨어 있다가 적절한 순간에 본능으로 등장한다.
 
과거의 흔적을 지우기가 얼마나 힘든가! 나의 마음은 끊임없이 외부의 자극에 습관적으로 반응하며 흔들린다. 이 순간에도 내 마음에는 평온이 없다. 근심, 걱정, 사랑, 증오 등 다양한 감정, 부정적인 시각, 미래에 대한 계획 등 수많은 것들로 가득차 있다. 핸드폰에서 끊임없이 울려대며 나를 유혹하는 SNS 소리, 그것에 무의식으로 반응하는 내 시선과 손가락, SNS가 소식을 전해주지 않는 5분을 기다리지 못해 핸드폰 화면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는 내 자신.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에서 이런 외부의 끊임없는 자극을 산스크리트어로 ‘브리티’vritti"라고 불렀다. 그는 정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쉼 없이 출렁이는 파도를 의미하는 브리티를 흔들리는 마음을 이르는 용어로 차용했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장 2절에서 “요가는 바다와 같은 인간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넘실대 나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방해하는 왜곡을 소명시키는 수련이다”고 정의했다. 그는 ‘요가수트라’ I.3~4에서 요가를 수련하는 자는 자신의 본연을 찾는 관찰자가 될 것을 당부한 후, 본연을 찾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진부한 생각의 반복과 흔적인 브리티의 종류를 소개한다.
 

오귀트스 로댕. '생각하는 사람'(1903)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클레사’(집착)
브리티는 색안경의 색과 같다. 내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왜곡시켜, 그 사물이 자신의 색이 아닌 전혀 다른 색을 지닌 것으로 보이게 한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5에서 이 ‘색안경’의 종류와 특징을 설명한다. “브리타야 판차타야 클리스타클리스타(vr̥ttayaḥ pañcatayyaḥ kliṣṭākliṣṭāḥ)." 번역하면 이렇다. “색안경(브리티)은 다섯 가지 마음의 상태에서 발견된다. 어떤 것들은 오염되었고, 어떤 것들은 오염되지 않았다.”

파탄잘리는 다섯 가지 브리티를 ‘요가수트라· I.6~11에서 차근차근 설명한다. 위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브리티의 속성을 의미하는 단어 ‘클리스타’(kliṣṭa)다. 산스크리트어에는 관련된 두 개 이상의 단어들을 하나의 단어로 묶는 ‘산디’(sandhi)라는 철자법이 있다. 산디는 흔히 ‘연속해서 소리를 낸다’고 하여 ‘연성’(連聲)이라고 번역됐다. ‘클리스타클리스타’는 산디다. 두 개의 서로 상반되는 단어가 하나의 단어로 연결됐다. 한 단어는 ‘클리스타’(kliṣṭa)이고 다른 단어는 정반대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부정사 ‘아’(a)가 단어 앞에 붙어 ‘아클리스타’(akliṣṭa)다.
 
내가 내 본연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는, 색안경에 덕지덕지 묻은 색(色)은 무엇인가? ‘클리스타’(kliṣṭa)는 '고통당하다'는 동사인 ‘클리스’(kliś)의 분사형으로 '고통스런, 색이 바랜, 피곤한, 상처 난, 어두운'이란 의미다. 예를 들어 꽃이 시간이 지나 자연히 시들면 그 꽃을 클리스타, 즉 ‘시들었다’고 말한다. 혹은 밤하늘에 떠있는 달이 구름에 가려 있다면, 그 달은 클리스타, 즉 ‘선명하게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새 옷이 색이 바래고 실타래가 풀어져 있다면 그 옷은 클리스타이다. 이 단어는 물건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갓 태어난 아이는 덧없이 반짝이고 약간의 움직임에도 반응한다. 이 총명함과 민첩함이 세월이 가져오는 세파에 시달려 무뎌진다면, 그 사람은 클리스타, 즉 ‘진부하다’.
 
‘요가수트라’에서 클레사는 인간이 지녀야 할 원래 모습을 잃고 자신의 본성을 왜곡하는 모든 것이다. 내가 오염된 브리티에 영향을 받으면, 나는 나의 관심을 끄는 물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것으로 자극받아 나온 행위가 ‘카르마’(karma)다. 카르마는 ‘일하다, 행동하다’는 동사 ‘카르’(kar)의 명사형인데, 인도 사상에서 특별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카르마는 필연적으로 그 행위에 반응하는 반작용을 유발시킨다. 카르마는 어떤 행위가 선이든 악이든 행동으로 옮겨진 첫 번째 행위일 뿐만 아니라, 그 행위가 유발한 다양한 반응을 포함한다. 클레사는 무의식적인 집착(執着)이다.
 
이 작용과 반작용의 끝없는 연속이 고대 인도인들이 ‘삼사라’(saṃsāra)라고 부른 구조, 즉 윤회다. 삼사라는 ‘하나’란 의미를 지닌 인도-유럽어 어근 *sem-과 ‘달리다, 미끄러지다’란 의미를 지닌 인도-유럽어 어근 *ser의 합성어로 '하나 안에서 끊임없어 미끄러지듯 정신없이 달려가다'라는 의미다. 삼사라는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되면서 ‘바퀴처럼 계속해서 돈다’라는 의미를 지닌 한자 윤회(輪廻)로 번역됐다.

나의 오늘은 내가 어제까지 해오던 생각, 말, 행동이 흔적을 반복적으로 남겨 견고하게 파인 습관의 연속이다. 나의 작용이 반작용을 유발하고 다시 반작용이 반반작용을 초래한다. 작용과 반작용의 악순환은 한순간에 끝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된다. 그것은 마치 숨을 쉬거나 눈을 깜빡이는 행동과 같다.
 
요가는 나의 생각, 말, 행동을 무의식적·습관적으로 장악하는 ‘집착’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키는 수련이다. 파탄잘리는 요가를 ‘아클리스타’, 즉 나에게 물든 그런 집착의 색을 다시 무색(無色)으로 만드는 훈련이라고 말한다. 나의 최선을 발견하는 장소인 마음, 그곳의 심연을 볼 수 없도록 훼방하는 집착들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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