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독립투사 남자현③]남자현의 남편, 의병 김영주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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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T&P 대표
입력 2018-01-30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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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영화 '대립군'에 등장하는 의병의 모습.]


# 남자현과 남편 김영주는 안동 출신으로 영양에 거주

1891년 남자현은 의성김씨 전서공후(典書公后) 매은공(梅隱公) 12대손인 김영주(金永周, 1862~1896.7.11, 김상주(象周)라고도 한다)와 혼인을 한다. 김영주는 안동면 일직면 귀미동 출신이라고 되어 있다. 박영석(건국대교수. 사회학)은 그가 영양군 석보면 답동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남자현의사의 민족독립운동’, 1994년 3.1여성 동지회가 주최한 ‘한국 여성독립운동의 재조명’에서 발표한 논문)

남정한의 증손자인 남재각은 “원래 고조부 남정한 선생은 의성김씨 집성촌인 안동시 일직면 귀미동에 살았고, 제자들에게 근왕창의(勤王倡義)와 위정척사를 가르치면서 당국의 감시가 심해져서 영양군 지경리로 옮겨왔다”고 말하고 있다. 즉 남자현의 집안과 김영주의 집안은 모두 안동에 거주하다가 영양으로 옮겨 생활했다는 얘기다. 남자현을 안동 출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이주 때문에 생겨난 논란이라고 볼 수 있다. 친정 증손자 남재각도 남자현과 김영주가 결혼할 무렵에, 김영주는 영양군 답곡(답동과 같은 곳)에 살았다고 증언했다.

남정한의 제자들은 대부분 의병 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등제자였던 남편 김영주 또한 의병으로 나가 싸우다 1896년 7월11일 진보 지역 흥구동 전투에서 순국한다.
 

[사진 = 영화 '대립군'의 의병들]



# 김도현 의병 소속으로 왜적과 싸운 남편 김영주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활동은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 전기 의병은 갑오의병과 을미의병을 중심으로 1894년에서 1896년까지 투쟁을 벌인 민간 부대이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조정에 내정개혁을 요구했다. 조선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6월 21일 경복궁을 공격해 점령했다. 그리고 친일내각을 구성해 자의적인 개혁을 추진한다. 이것을 갑오변란이라고 한다. 이에 항의해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갑오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을미사변)되자 단발령이 선포되자, 다시 전국적으로 의병이 들고 일어난다. 이것이 을미의병이다. 경북 지역 의병은 ‘퇴계의 군대’라고 할 만큼 이황(1501~1570)의 학문을 추종하는 유학자들로 구성되었다.

영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의병은 김도현(1852~1914, 김녕 김씨)이다. 1895년 12월9일 단발령에 항거하여 영양읍에 통문을 돌렸으나 유림들의 반응이 미지근했다. 그의 영양에서의 기반이나 신분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학연과 지연으로 엮인 유림들의 전통에서 볼 때 그의 휘하에 드는 것은 마뜩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안동의 유시연의 권유를 받고 1896년 1월3일 청량산에서 일가 사람과 촌민 19명을 거느리고 창의를 한다. 영양에서는 주곡 출신의 유생 조승기를 중심으로 부대가 구성된다. 김도현부대가 2월 6일 안동으로 들어갔을 때는 벌써 총포로 무장한 수백명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영양, 안동, 영주, 봉화, 진보, 청송의진과 합진(合陣)을 요구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는 “병사는 의리로 합하는 것인데 만일 마음이 같지 않다면 어찌 서로 합할 수 있으랴?”며 쓸쓸히 돌아섰다. 그는 3월말 예안에 가서 선성의진과 마침내 합진을 한다. 3월 20일 안동, 호좌, 풍기, 순흥, 영천, 봉화, 선성 등 7개 의진이 함창 태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략하기로 합의한다. 전략도 없이 각개 약진으로 출격하는 전투였다. 잇단 전투에서 김도현 의진은 참담하게 패퇴한다. 뜻은 컸지만 현실은 무기와 전술의 격차로 무기력할 수 밖에 없었다. 남자현의 남편 김영주는 김도현 의진에 소속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 24세에 뱃속에 아기를 지닌 채 남편을 잃은 그녀

1933년 8월 26일자 <조선중앙일보>는, 남자현 순국 직후의 보도에서 ‘본적지에 본부를 둔 한국의병대 대장 김00의 부하 김영주와 같이...’라고 말하고 있어서 그런 심증을 더욱 굳혀준다. 당시 그곳에서 활약하던 의병대장 중에 김씨는 김도현 한 사람 뿐이며, 또 ‘본적지에 본부를 둔’이라는 표현이 김도현 생가가 있는 상청리의 검각산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시의 의병 활동은 의병들만의 싸움이 아니라 주민 전부가 마음 속으로 거드는 국민전투였으며, 남자현의 집안도 거의 전시(戰時) 상태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19세에 결혼을 했지만 남편 얼굴 보기는 정말 힘들었다. 장인인 남정한에게 공부를 하러 가기는 했지만, 사실은 의병활동의 전략을 논의하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5년 동안 아기가 없었던 사정도 그런 맥락에서 수긍이 간다.

‘남자현 약전’에는 부친 남정한도 의병 활동을 했다고 기록한 곳이 있지만, 구체적인 활동은 찾기 어렵다. 아마도 제자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배후(背後)로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날마다 조마조마하고 불안불안했던 ‘아내’ 남자현에게 청천벽력같은 뉴스가 들려왔다. 그녀 나이 24세. 남편 나이 35세.
 

[사진 = 구한말 의병들(출처 = 위키피디아)]



# 여보, 저 아직 당신께 말씀 못드린 것이 있어요

많은 사람이 나날이 죽어가는 시절이었지만, 김영주의 죽음은 그녀를 견디기 어렵게 만들었다. 전투보다는 책읽기에 더 뛰어났던 사람이었다. 시절이 그를 홍구동의 산골짝으로 몰아넣었고 죽기살기로 뛰던 이 남자는 ‘왜의 포를 맞아 탄환이 겨드랑이를 뚫어 피가 몹시 흐르는’(김도현 ‘전투기록’의 표현을 빌렸다) 채 숨을 몰아쉬며 죽어갔을 것이다. 지경리와 홍구면은 코닿을 듯 가까운 곳이었다. 그는 죽어가며 마을 쪽을 바라보았을까.

남자현은 마을 앞을 흐르는 반변천 앞에서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여보, 저 아직 당신께 말씀 못드린 것이 있어요.” 그녀는 임신을 하고 있었다. “돌아오면 기쁘게 해드리려고 했는데...” 오열하는 며느리 옆에 친정아버지 남정한이 묵묵히 서 있었다. 내가 무리하게 사위와 제자를 사지에 몰아붙여, 이런 일을 만들었구나. 미안하다. 내 딸아. 가만히 남자현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이상국 아주T&P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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