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소멸消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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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01-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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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경험
인간은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간에 태어나 그 '환경'으로부터 운명적인 지배를 받는다. 그 환경은 내가 세상을 보는 틀을 제공한다. 나는 이 틀을 통하지 않고는 세상을 볼 수 없다. 이 틀은 내 눈이며 안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안경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투명하지 않다. 내가 세상을 아무리 객관적으로 관찰하려고 노력해도, 환경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해석할 수밖에 없다. 내 세계관은 내가 세상을 이해하려는 매개체다. 내 세계관은 이중적이다. 나는 이 시선을 통해 세상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획득한다. 그러나 이 시선은 세상을, 내 조그만 지식은 한계를 통해 외부를 해석하는 '왜곡'을 한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도구는 근본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 도구는 일상생활에서 갖는 내 마음가짐이다. 만일 내가 중요한 미팅에 늦어 급하게 운전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런 경우 내 운전을 방해하는 빨간 신호등이 자주 등장하고, 그 신호등도 한번 켜지면 영원히 지속되는 것 같이 느낀다. 반대로 만일 약속시간보다 일찍 집에서 나섰다고 가정하자. 나는 운전 자체를 즐긴다. 약속장소로 가는 내 운전은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 불행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다. 무엇이 내가 동일한 경험을 질적으로 전혀 다른 두 가지로 만들었을까? 인간의 마음은 훈련하지 않는 한, 색안경과 같다. 붉은색 안경을 끼면 세상이 온통 붉은색이고, 파란색 안경을 끼면 세상은 파란색이다. 이 색안경을 벗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훈련이 바로 ‘요가’다. 요가의 목적은 바로 이 색안경을 벗는 것이다.
 
‘요가수트라’
파탄잘리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요가에 관한 다양한 지혜를 하나로 엮었다. 그는 저자라기보다 편집자다. 사실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그의 이름으로 책을 바쳤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 ‘엮는 행위’의 결과가 ‘수트라’(sutra)다. 인간들은 오래 전부터 성현들의 지혜를 소중하게 여겼다. 이 지혜의 축적은 그들 생존과 직결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냥하는 방법, 불을 다루는 방법, 농사를 짓는 방법과 같은 것들이다. 그들은 먼 옛날부터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경구(經口)들을 보존, 다음 세대로 전달해 정교한 문명을 구축했다. 고대 인도에선 이런 경구들은 널찍한 나뭇잎이나 나무에다 적고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 보존했다.

아주 오랜된 인도-유럽어 어근 *syu-는 ‘묶다, 꿰메다’라는 뜻이다. ‘실로 꿰메다’란 영어 단어 ‘소우’(sew)가 이 어원에서 유래했다. ‘수트라’는 ‘묶다’라는 동사의 과거분사형으로 ‘묶어진 것, 한데 꿰매진 것’이란 의미다. 고대 인도인들은 이 경구들이 적힌 나뭇잎을 차곡차곡 쌓아 하나로 묶어 보관했다. ‘수트라’는 바로 이것이다. ‘불교경전’이란 산스크리트 단어 ‘수타’(sutta)도 이 단어다. ‘경전’(經典)이란 중요한 경구들이 적힌 나뭇잎이나 종이를 실(糸)로 묶어 제사상에 올려놓은 책들(典)이다.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는 ‘요가’에 관한 금언집이다. 그(혹은 그의 제자들)는 요가에 관한 196개의 수트라, 즉 경구들을 모아 다음과 같이 네 권의 책으로 편집하였다. 첫째 책 ‘사마디 파다’에서 요가를 정의하고, 둘째 책 ‘사다나 파다’에서 요가 수련과정을 설명한다. 셋째 책 ‘비부티 파다’에선 요가 수행자들이 획득하는 삶의 혜택들을 설명하고, 넷째 책 ‘카이발야 파다’는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완벽하게 해탈하는 자유를 기술한다.
 
요가의 정의
파탄잘리는 요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필자는 ‘요가수트라’ 제1권 1절을 편의상 약어 'YS I.1'로 표시할 것이다). “요가는 지금 여기에 몰입하는 훈련이다”(YS I.1). 그는 요가가 훈련과정이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그는 YS I.2에서 요가를 간결하게 정의한다. 요가에 관한 가장 경제적이며 선명한 정의다. 요가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무엇인가? 인도의 베단타철학은 요가를 ‘합일’이라고 가르친다. 이 정의가 분명 요가의 다양한 정의들 중 하나이지만, 파탄잘리의 요가 정의와는 정반대다. 요가는 오히려 ‘분리’다. 요가는 인간의 원래 모습인 참자아를 세상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시도다. 파탄잘리의 정의에는 합일이 없다. 파탄잘리는 요가를 다음 세 가지 개념을 빌려 간결하게 설명한다. ‘의식’, ‘소용돌이’ 그리고 ‘소멸’이다.
 

히로시 스기모토, '뉴질랜드 느가루푸푸 갑에서 본 태즈먼 해'(1991)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내 의식’이라는 안경, ‘치타’(chitta)
파탄잘리는 요가를 설명하기 위한 첫 번째 요소로 ‘치타’(chitta)라는 단어로 설명을 시도한다. 동서고금의 경전에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들이 대개 그렇듯이, 산스크리트어 치타가 지닌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한국어나 영어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치타’라는 단어는 문장으로 그 본래 의미를 가장 경제적으로 설명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치타는 나의 생각, 말, 행동에 영향을 주는 모든 것이다. 예들 들어, 내가 심한 감기가 들었다면 등산 가기가 힘들다. 내 건강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든다. 내가 세상을 판단하고 대응하는 수준이다.

치타는 흔히 ‘의식’으로 번역된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의식이 아니라, 나의 교육과 수련 정도에 따라 어떤 대상을 경험할 때 발생하는 ‘의식’이다. 치타는 수련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발생한다. 요가는 내가 지닌 세상을 보는 안경을 깨끗이 닦는 훈련이다. 인간은 구체적인 시점과 장소에 태어나면서부터 그 환경을 통해 자신의 의식을 만들어간다. 그(녀)는 어느 순간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유일할 뿐만 아니라, 최선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한다. 요가는 이 착각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나오는 훈련이다. 우리는 이런 훈련을 넓은 의미에서 ‘교육’이라고 부른다. 교육은 ‘무엇을 가르쳐서 이 착각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미몽에서 탈출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더 위대한 내 자신’을 발견해 ‘외부로’(e-) ‘인도하는 행위’(ducare)다.
 
인생이라는 소용돌이, ‘브리티’(vr̥tti)
세상은 소용돌이다. 매순간 다양한 외부의 자극으로 흔들린다. 나의 눈은 외부를 향해 있기 때문에 내가 인식하는 이미지는 다시 나에게 돌아와 내 의식에 영향을 준다. 강은 멀리서 보면 평온한 것 같으나 다가가서 자세히 보면, 그 표면은 잔물결들로 끝없이 흔들린다. 내가 호수의 바닥을 보려할 때 내 시야를 방해하는 ‘물결’ 혹은 ‘소용돌이’가 있다. 파탄잘리는 이것을 ‘브리티’(vr̥tti)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브리티는 ‘빙빙 돌다’라는 산스크리트어 동사 vr̥t에서 파생된 명사로, ‘빙빙 도는 상태’ 즉 소용돌이를 의미한다. 소용돌이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버텍스’vortex도 같은 어원에서 만들어진 단어다.
 
위에서 언급한 ‘내 의식’이라는 안경으로 비유해 설명하자면, 브리티는 내가 세상을 보는 도구이며 안경인 ‘치타’에 나도 모르게 두껍게 칠해진 색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과 연결돼 있는 ‘위대한 내 자신’을 찾아 갈 수 없게 만드는, 어두운 ‘색안경’을 착용한다. 나 자신을 직시하려는 수련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한 장소와 한 시대를 산다는 역사적인 존재로서의 제한 때문에 왜곡된 의식을 지닐 수밖에 없다. 더욱이 나의 눈이 외부로 향해 있어 내 심연으로 들어가 내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을 듣지 않고, 내 주위 사물들과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을 부러워하고 흉내내기 바쁘다.

세상은 그 외부의 대상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우리를 지속적으로 가르친다. 내 자신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브리티다. 내가 어떻게 매일매일 일어나는 잔물결을 잠잠하게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나에게 감동적인 '참 나'가 숨어있는 심연으로 들어가, 그 안에 숨겨진 보석을 발견해 세상으로 나올 수 있을까?
 
소멸훈련, ‘니로다’(nirodha)
요가는 조절이다. 요가는 내 마음이라는 호수에서 표면이 출렁이지 않도록 훈련하는 과정이다. 요가는 그 물결과 소용돌이를 잠재우려는 ‘소멸훈련’이다. 파탄잘리는 소멸수련을 산스크리트어로 ‘니로다’(nirodha)라고 부른다. 니로다는 ‘안으로, 밑으로’라는 접두사 ‘니’와 ‘소멸시키다, 근절하다, 억제하다’라는 동사 ‘루드’(rudh)의 합성어다. 나에게 물밀 듯 일어나는 소용돌이란 무엇인가?

인도의 상키아 철학은 인간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짐승과 같이 자신이 먹기 위해서 남에게 해주기를 주저하지 않는, 어둠과 혼동의 삶인 '무식'(無識), 둘째는 남을 의식하면서도 자신만의 사익과 자극을 위해 사는 '욕망'(欲望), 셋째는 ‘위대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진선미를 추구하는 '조화'(造化)다. ‘니로다’는 자신을 위한 최선인, ‘조화’를 위해 ‘무식’과 ‘욕망’을 제어하고 소멸하는 훈련이다.

요가를 수련하는 자는 자신의 마음 고삐를 제어하지 않는다면 쉽게 ‘무식’에 빠져 남을 해치거나 ‘수련하지 않은 자신’의 욕망에 빠져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가치를 상실한다는 사실을 안다. 요가는 이런 어리석음을 소멸해가는 훈련이다. 파탄잘리는 요가를 ‘요가수트라’ I.2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요가쉬 치타 브리티 니로다"(yogaś-citta-vr̥tti-nirodhaḥ).
 
직역하면 '요가는 의식에 일어나는 소용돌이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다시 풀자면, '만일 당신이 요가를 꾸준히 수련한다면 당신의 의식에서 항상 요동치는 무식과 이기심이라는 소용돌이를 소멸시킬 수 있다'가 된다. 나는 내가 ‘무식’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나는 매순간 출렁이는 외부의 자극에 쉽게 출렁이지 않는가? 나는 내 마음의 호수 깊은 곳에 숨겨진 보물을 보기 위해 지금 이 순간 수련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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