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51] 충선왕을 통해 본 麗蒙 관계는?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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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1-23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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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고려인 환관 모략으로 티베트 유배

[사진 = 시데발라(英宗)]

만권당에서 학문을 논하고 그림을 그리며 지내던 충선왕의 호시절은 몽골의 대칸이 시데발라(英宗)로 바뀌면서 끝이 났다. 당시 몽골은 여걸 다기에 의해 좌우되는 세상이었다. 아들 아유르바르와다(仁宗)가 죽자 손자인 시데발라를 꼭두각시 대칸으로 삼은 다기가 모든 실권을 잡고 몽골제국을 주무르고 있었다. 충선왕은 후원자였던 다기의 아들들이 사라지면서 입지가 약화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충선왕의 존재를 가시처럼 여기던 몽골황실의 고려인 출신 환관 바얀투구스(伯顔禿古思)가 충선왕을 모략했다. 바얀투구스는 충선왕이 자신에게 벌을 내린데 앙심을 품고 충선왕을 모략한 것이었다. 충선왕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전답과 노비를 강탈하는 전횡을 저지른 바얀 투구스를 벌을 준 적이 있었다. 모양은 그랬지만 권력 다툼에서 밀려났다고 보는 것이 옳다.

▶ "불경 공부하라는 명목으로 유배"

[사진 = 왕후관련 고려사]

모략에 휘말린 충선왕은 먼 티베트 땅으로 유배의 길에 오른다. 고려사는 몽골의 황제가 충선왕에게 불경을 공부하라는 명목으로 토번으로 유배를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충선왕이 아들로 삼아 호적에 올렸던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왕후(王煦)는 충선왕을 대신해서 귀양을 가겠다고 나서서 황제인 영종 시데발라는 물론 몽골 황실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사진 = 충선왕 유배길]

왕후는 원래 정승 권보(權潽)의 아들로 원래 이름은 권재(權載)였으나 충선왕이 대도로 불러 왕후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아들로 삼아 호적에 올린 인물이다. 그는 나중에 티베트로 가서 충선왕을 모시고 있다가 유배지에서 돌아올 때 함께 오기도 했다. 그는 충선왕에게 생전과 생후에 가장 충성스러운 인물이었던 것으로 고려사 열전이 기록하고 있다.

▶ “밥은 찐보리에 거처는 토굴”

[사진 = 이제현]

충선왕이 히말라야 산자락의 오지 티베트에서 어떻게 보냈는지는 이제현(李齊賢)이 충선왕 구명을 위해 몽골황실의 고위인사(元郎中)에게 보낸 청원서에서 엿볼 수 있다.

"티베트는 고국에서 만 여리나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도적은 때 없이 나타나며 천막을 치고 들에서 잡니다. 기루한 걸음으로 반년 만에 도착하는 먼 곳입니다. 밥은 찐보리 가루고 거처는 토굴이라 길가는 사람이 듣고도 눈물을 흘리겠거늘 하물며 그의 신하된 자는 어떻겠습니까?"
 

[사진 = 티베트 사캬사원]

이제현은 먼 서역 땅을 마다하지 않고 유배 중인 충선왕을 찾아가 어려움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충선왕이 유배를 가서 지낸 곳은 티베트의 사캬지역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 감숙성 난주]

충선왕이 나중에 티베트에서 감숙성 지방으로 유배지를 옮겨서 지나는 동안 대칸 시데발라가 쿠데타로 숨지고 이순 테무르(太定帝)가 1323년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이순 테무르는 카말라의 아들이니 충선왕에게는 처남이었다. 충선왕은 당연히 방면돼 대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생은 얼마 되지 않아 유배지에서 돌아온 지 2년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쉰 한 살의 나이였다.

▶ 여인들을 사랑한 충선왕

[사진 = 숙비발원 수월관음도(일본 경도 泉屋博古館 소장)]

충선왕의 삶에는 여인들의 얘기가 심심찮게 끼어든다. 여난(女難)으로 왕의 자리에서 밀려났던 것은 이미 언급된 일이다. 아버지인 충렬왕의 부인이었던 숙비(淑妃) 김씨를 취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숙비는 언양군(彦陽郡) 김문연(金文衍)의 여동생으로 과부였으나 충선왕이 세자 시절 아버지인 충렬왕에게 바쳤던 여인이었다, 당시 고려의 윤리로 보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그가 몽골의 풍습에 젖어 살아온 절반이 몽골인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아버지가 죽은 뒤 아버지의 후궁을 자신의 부인으로 삼는 것은 몽골에서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별 죄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를 일곱 명이나 낳았던 과부 허씨(中贊 허공의 딸)를 부인으로 삼아 순비(順妃)로 책봉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과부를 왕비로 삼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충선왕의 여성관이 상당히 개방적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재혼을 한 두 여인인 숙비와 순비는 사이가 유독 나빠 한 연회 자리에서 두 사람 모두 다섯 번이나 옷을 갈아입을 정도로 시기심이 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연꽃과 관련된 몽골 처녀
왕이 되기 전에는 공녀로 끌려갈 처녀를 눌려 앉혀 세자빈으로 삼기도 했다. 그녀가 정비 왕씨로 서원후(西原侯) 왕영(王瑛)의 딸이었다. 그녀는 몽골 황실의 요구에 따라 공녀로 갈 운명이었다. 그러나 충선왕이 장차 자신이 그녀에게 장가를 들려 한다고 말해서 공녀에서 제외됐다.

그리고 1289년에 충선왕과 결혼해 세자빈이 됐다. 고려에서는 동성동본간의 결혼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몽골은 이를 금하고 있기 때문에 몽골황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숙비의 경우와 달리 이 경우는 고려의 풍습에 따랐다. 결국 동성동본간의 혼인을 금지하라는 몽골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충선왕은 1308년 이를 받아들여 교서를 통해 동성혼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사진 = 북경 북해공원 연꽃]

대도에 있을 때 몽골 처녀와 인연을 맺은 뒤 헤어지면서 연꽃을 이별의 징표로 남긴 것과 관련해 일화도 전해진다. 보내신 연꽃송이 (贈送蓮花片) 처음 활짝 붉었더니 (初來灼灼紅) 가지 떠난 며칠 안에(辭枝今幾日) 이 몸처럼 야위었네(憔人與同) 몽골 여인이 전한 애달픈 심정이 이 속에 담겨 있다. 충선왕이 여인과 관련해 많은 일화를 남긴 것은 그가 예술을 좋아하는 다정다감한 성품을 지닌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소설 소재로 흥미 있는 일생

[사진 =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 포스터 ]

시대의 산물인 태생적인 특성과 몽골의 그늘아래서 산 우여곡절이 많은 삶 그리고 여인들의 얘기 등 충선왕의 생애에는 관심을 가질만한 여러 가지 요소가 담겨져 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소설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드라마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충선왕의 얘기는 "왕은 사랑한다."는 제목으로 MBC TV가 2017년 7월부터 드라마로 방영했다.

같은 제목의 작가 김이령의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어 멜로 사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드라마는 충선왕이 세자로 있을 당시 사랑이야기를 주로 다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극의 사랑얘기가 그렇듯이 여기에 나오는 얘기도 거의 대부분 허구다. 소설의 작가가 얘기한대로 기록되지 않은 충선왕 삶과 원이라는 이름으로 지냈던 세자시절의 사랑과 갈등을 상상으로 복원한 것이다.

개혁의지가 남달랐던 충선왕은 난세가 아니었다면 통치자로서 자질을 보여줄 수 있었던 재목이었지만 고려의 왕으로서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것은 전적으로 몽골의 지배 아래서 앞서 언급한대로 세 가지 직책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고려왕의 숙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의 피가 고려와 몽골의 절반이었던 것처럼 고려의 반쪽 임금으로 그의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평생 동안 충선왕을 섬겼던 왕후는 상복 차림으로 충선왕의 시신을 받들고 고려로 돌아왔다. 그리고 장례를 치른 뒤 평생토록 초하룻날과 보름날 충선왕의 덕릉을 찾아 제사를 지냈다. 왕후는 충선왕이 죽은 지 20년이 돼도 시호를 받지 못하자 많은 재산을 들여가며 원나라 황실에 청해 시호를 받아 내기도 했다. 고려사 열전은 왕후는 강직하고 장중한 인물로 하찮은 벼슬아치에게도 예를 다해 대접하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충선왕에게 왕후는 최상의 충신, 몽골로 말하면 너흐르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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