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50] 충선왕을 통해 본 麗蒙 관계는?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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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1-22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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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충렬왕, 공주재가운동 적극 개입

[사진 = 대도 어원(御苑)]

다시 왕의 자리에 오른 충선왕의 아버지 충렬왕은 갈등 관계에 있는 아들 충선왕을 제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폐위되기는 했지만 충선왕은 원나라로 소환됐을 뿐 황실 부마로서의 지위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또한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서의 위상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대도 궁궐 안에 살면서 나름대로 영역을 구축하고 있던 충선왕을 쉽사리 제거하지는 못했다.

특히 충렬왕은 아들을 왕의 자리에서 밀어내는 무고사건을 저질렀던 계국대장공주, 즉 며느리를 다른 인물에게 개가시키려는 움직임에 적극 개입했다. 아들과 몽골황실 황제와의 관계를 단절시켜 아들이 환국(還國)할 수 있는 여지를 아예 제거하려는 시도였다.

▶ 충렬왕, 무산된 공주 재가 시도
충렬왕은 공주를 고려 종실 가운데 한명인 서흥후(瑞興候) 왕전(王琠)과 재혼 하도록 만들어서 아들의 왕위계승권자로서의 자격을 박탈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이 같은 시도는 충렬왕 27년인 1301년부터 5년 동안 계속됐다. 충렬왕은 사신을 보내 공주의 개가를 몽골 황실에 청하려 했지만 무산됐다.

1303년에는 자신이 직접 대도로 가서 황제를 직접 친조하려 했지만 황제가 허락하지 않아 불발 됐다. 그러자 1305년에는 충렬왕이 직접 측근세력들을 이끌고 몽골에 입조해 공주의 개가를 위한 활동을 펼쳤다. 충렬왕과 충선왕 세력 간에 벌어진 공주의 개가 문제와 관련된 정쟁에서 몽골측이 충선왕의 손을 들어주자 대세는 충선왕 쪽으로 기울었다. 이를 계기로 충선왕은 고려의 국정까지 장악하는 유리한 입지에 서게 됐다.

[사진 = 카이샨(武宗)]

부자간의 세력균형이 아들 쪽으로 기우는 것과 때를 같이해 카이샨(武宗)이 대칸의 자리에 오르면서 사실상 모든 게임이 끝났다.
 

[사진 = 아유르바르와다(仁宗)]

카이샨은 다기의 아들로 동생인 아유바르와다(仁宗)를 제치고 대칸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충선왕은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카이샨이 대칸의 자리에 오르는 데 공을 세우면서 입지가 더욱 굳어졌으니 충렬왕이 손 쓸 다른 방법이 없었다.

▶ 심양왕이 된 충선왕

[사진 = 심양]

카이샨은 충선왕을 심양왕(瀋陽王)에 봉했다. 심양은 한때 봉천(奉天)이라고 불려 지던 곳으로 청나라를 세운 누루하치가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옛 고구려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고 일제 때 독립운동의 활동무대로 이용되기도 했던 이 도시는 한민족과 인연이 깊다.
 

[사진 = 심양 지도]

당시에도 심양을 중심으로 한 요령성에는 고려의 전쟁포로와 고려 유민들이 많아 고려의 영토와 같은 특수지역이었다.
 

[사진 = 심양 궁궐]

그래서 충선왕을 심양왕으로 봉한 뒤 통치권을 대폭 확대해줬다. 이는 카이샨이 충선왕을 지방의 왕으로 인정할 만큼 서로의 관계가 밀접했다는 점도 있겠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고려왕과의 대립을 조장해 고려왕실을 약화시키려던 이이제이(以夷制夷)전략을 구사한 측면도 있었다. 이듬해인 1308년 충렬왕이 사망하자 충선왕은 다시 왕위에 올랐다. 10년만의 복위였다.

▶ 두 달 만에 무산된 개혁정치

[사진 = 충선왕 가계도]

10년 만에 왕의 자리로 돌아온 충선왕은 첫 번째 왕위에 올랐을 때와 마찬가지로 의욕적으로 혁신정치를 들고 나왔다. 공평한 세금부과, 인재 등용의 개방, 귀족 횡포의 엄단, 동성결혼의 엄단 등이 그 것으로 고려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은 듯 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충선왕은 즉위 당시와 다른 현실인식과 정치인식의 바탕위에서 정치를 펼쳐갔다.

우선 몽골황제와 고려국왕 사이의 상하관계가 보다 분명한 형태로 나타났다. 또 하나는 충선왕이 자신의 권력유지와 강화를 위해 몽골 황실의 황제와의 관계를 강화해 나갔다는 점이다. 이는 즉위 당시와는 다르게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충선왕 스스로가 왕의 역할을 숙부인 제안군(齊安君) 왕숙(王淑)에게 대행시키고 두 달 만에 대도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오랫동안 몽골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던 데다 학문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현실정치가 구미에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기는 하지만 충선왕이 고려왕의 자리를 사실상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더 이상의 개혁정치를 기대하기는 어렵게 됐다.

▶ 전지정치로 국정 운영
이후 전지정치(傳旨政治)라는 기묘한 형태로 국정이 운영됐다. 멀리 있는 왕이 전달자를 통해 신하들에게 교지를 내려서 하는 정치가 바로 전지정치다. 다른 말로 요령통치(遙領統治)라고도 한다. 다른 나라에 머물면서 지시하는 이러한 국정운영 방식에 현실감이 있을 리 없었고 자연히 개혁정치는 무산돼 버렸다. 반면에 본국에서 해마다 쌀 4천 곡(斛)과 포 10만 필을 비롯한 수많은 물자가 왕의 대도 생활을 위해 수레로 실려 갔으니 폐해가 극심했다.
 

[사진 = 충숙왕]

신하들이 고려로 돌아올 것을 종용했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세자 감(鑑)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충선왕은 곧 세자와 그 측근들을 대도로 불러들여 죽여 버렸다. 그래도 환국 요청이 계속 이어지자 둘째아들 왕도(王燾)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줬다. 그가 바로 충숙왕(忠肅王)이다.

그리고 자신은 상왕(上王)으로 물러앉았다.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것은 묵과하지 않으면서 고려로 돌아가기는 싫었던 그는 자신의 손으로 후계자를 지명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 만권당 세워 학문 연구

[사진 = 조맹부]

이후 충선왕은 대도의 자신의 집에다 독서당인 만권당(萬券堂)을 세웠다. 이 일은 학문을 좋아하는 충선왕의 구미에 꼭 맞는 일이었다. 상왕의 자리에 있어서 입장도 자유로웠고 재정이 비교적 넉넉한데다 몽골 황실과의 관계도 좋았기 때문에 만권당을 운영하는 일은 순조로웠다. 충선왕은 당시 중국 땅에서 이름난 학자인 조맹부(趙孟頫)와 원명선(元明善), 염복(閻復) 등을 이곳으로 초대해 깊은 교류를 가졌다.

물론 고려의 학자들도 불러들여 그들과 교류하게 함으로써 고려 학문의 바탕을 닦도록 만들었다. 고려 때 성리학 대학자 백이정(白履正)은 바로 이 만권당에서 10년 동안 원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성리학(性理學)의 바탕을 닦고 체계를 잡았다. 그리고 고려로 돌아가 많은 제자를 길러내면서 주자학이 조선시대 들어 활짝 꽃피울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사진 = 이제현]

충선왕이 부른 또 한사람의 학자는 역옹패설의 작가 이제현(李齋賢)이다. 백이정(白頤正)에서 이제현으로 이어진 학문은 고려 말에 이색 등 삼은(三隱)으로 불려지는 학자들에게 전수되면서 성리학의 체계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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